삶의 법칙
가끔은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은 풍요롭고 고요했다. 풍요롭고 고요했던 것들이 어느 날 세상 밖으로 나와 허망하게 깨져갔다. 그곳에는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삶이 존재되어 갔다. 하지만, 존재의 명확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채우고 가져봐도 항상 부족하고 만족하지 않았다. 내려놓지 못한 욕심의 부활 때문일까, 우리는 이 시대에 욕심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긴 하다.
지금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기대치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고 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고 존 스튜어트 밀은 말했다. 흔히 생각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로 사용되지만, 가끔은 배부른 돼지가 되어보자고 주문을 외워보기도 한다. 가끔은 생각 없이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돼지뿐 아니라 사람들도 배만 부르면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있다. 가장 솔직한 현상일 수 있다.
가끔은 단순함을 꿈꾼다.
" 먹기 위해 사느냐",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느냐",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어느 날 무엇이 먼저인지 원인을 찾기 위해 생각은 미묘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결국 생각을 끝낼 돌지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잡념만 키웠다.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성일 수도 있다. 앞뒤면이 바뀌었다고 동전의 가치가 달라질 수는 없다.
어떤 날엔 재물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모한 도박에 승부수를 걸었다. 윷판의 승부수와 같다.
"모 아니면 도"
"아니면 말고 " "되면 좋고"
확률의 가치는 ‘50대 50’이다. 말 끝에 생각은 극단적이고 갈 때까지 가버렸다.
경기가 안 좋을수록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고 한다. 가능성 없는 꿈을 거머쥐려는 어리석음일까, 항상 당첨자는 존재하니 그렇다고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내게 얻어진 결과가 아닐 뿐이다. 그래도 나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복권을 샀다.
시름에 빠져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 하루 24시간도 모자람으로 가치 있는 시간을 즐겨 가는 사람, 삶에 보장된 24시간은 모두가 달랐다. 삶에는 분명 법칙은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이것이다라는 정해진 법칙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생각의 깊이를 내려놓아야 할까,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가 존재한다"라는 뜻이 담긴 불교의 열반의 세계라면 삶은 어떠할까,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는 삶보다는 먼저 남을 알아가고 인정해 주는 현명함이 우선이 되어야 삶이 수평을 이룰 것 같다.
밴쿠버는 하루종일 비와의 전쟁이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내내 비소식이다. 비 때문일까, 괜한 생각만 늘어난다. 바빠야 할 시간에 한가한 게으름 때문 일지도 모른다.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라면 특별한 방식이 어디 있겠는가.
괜히 생각만 심오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