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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타델레 Oct 18. 2021

나와 떠나는 6시간 30분

나와 떠나는 6시간 30분



코로나를 빼고는 무엇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이라는 타이틀로 잠정적 보류 상태가 되었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언제 나빠질지, 혹은 나아질지 모르는 상황 앞에서 묘하게 무기력하기도 했다. 잠들기 전 루틴 중 하나였던 ‘전세계 최저가 항공권 검색’ 앱을 삭제한지도 몇달 되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사라진 어느 맥 빠진 여름밤, 내 심심한 손은 ‘ktx 기차표’검색을 시작했다. 여행도 캠핑도 열렬히 좋아하지만 강원도를 가 본  적은 별로 없었다. 4시간 이상의 거리라면 전라도를, 바다를 가고 싶으면 제주도를 즐겨 찾았기 때문이리라. 제주가 좋아서 아이와 둘이 일년살이를 막 마쳤던 참이기도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강원도를 가 본 것은 작년 여름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강릉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 강릉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얼마전 생긴 ktx 노선 덕분에 두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었고 15분 정도 택시를 탔더니 넓고 호쾌한 해변이 펼쳐져 금새 딴 세상에 온 것 같기도 하였다. 도시의 규모 대비 개성있는 카페는 또 얼마나 많던지! 결혼식 끝나고 어떤 카페를 들려볼지 구글 앱을 둘러보며 행복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결혼식에 참석하고 바다를 본 다음 커피 한잔을 마시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었다.



그래. 내일은 강릉이다. 즉흥적인 마음이 되어 다음날 아침 9시 기차를 끊었다. 돌아오는 기차편도 함께 끊었다. 오후 3시 30분 기차였다. 6시 전에는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하니 5시 30분에는 서울역에 도착해야 했다. 잠을 충분히 잔 것도 아니었지만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보다도 일찍 눈이 떠졌다. 하루 안에 돌아올 예정이었으므로 짐은 따로 챙길 것도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다. 썬크림만 간단히 바르고 편안한 옷을 입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의 진동을 느끼며 맥모닝 세트를 먹는 것이 ‘이른 아침 기차의 맛’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시대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다. 기차 내에선 음식물 섭취를 자제해 달라는 안내방송이 연신 흘러나왔다. 선로에 서서 커피를 흡입하듯 들이키곤 잽싸게 기차에 올랐다. 강릉에 가서 무엇을 할지는 기차 안에서 천천히 생각해 볼 참이었다. 기대하는 것이 없었는데도 설레였다.



8월의 창 밖은 두말할 나위없는 녹색이었다. 태백산맥을 지나는 길엔 병풍처럼 겹겹이 쌓인 산들과 수십개의 깜깜한 터널들이  교대로 펼쳐졌다. 작년에도 이렇게 신록이 무성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결혼식 참석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6세 어린이를 무사히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 이었을거다. 창 밖 풍경이 익숙해지자 의자를 뒤로 젖히곤 구글맵을 켰다. 강릉에서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기대감은 없었다. 하지만 4시간 남짓한 시간이 있을 뿐이니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정하고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오후 3시 반에는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


하루 안에 시간을 촘촘히 써야 하니 의도치않게 능동적 인간이 되었다. 어젯밤 갑자기 기차표를 끊었을 때 부터 능동적인 인간이 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강릉역에 내리니 한여름다운 건조하고 뜨끈한 바람이 훅 밀려들어왔다. 기차역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서 송정 해수욕장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5500원을 지불하고 내렸다. 그늘이 우거진 소나무숲을 걸으니 금새 해변이 나왔다. 서울역에서 9시 기차를 탔는데 이제 고작 11시 반. 서울에서의 11시반을 생각해보자. 요즈음으로 치자면 거의 집에 있을 시간이다. 집안 정리를 하다가 일을 좀 해볼까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컨디션이 안좋은 어떤 날엔 넋놓고 맞이하기도 하는 11시 반인 것이다. 완벽하게 낯선 지역에 있다는 것은 시간을 다르게 쓰고 흘러가게 하는 것 같다. 아직 12시가 채 되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하며 신발을 벗었다.



아뿔싸. 혼자 강릉을 간다고만 생각했지 ‘어떻게’ 보낼지는 치밀하게 계획하지 못했다. 8월의 바닷가엔 응당 피크닉매트와 타월과 수영복이 있어야 하거늘 그냥 온 것이다. 오늘 같은 날 새로 산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쓱 들어가 다이빙을 하고 나왔다면 심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완벽한 하루로 기억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아쉬운데로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 파도가 철썩이는 타이밍에 맞춰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해보았다. 8월의 햇살이 강력했다. 모자를 쓴 뒷통수가 목덜미는 타는 것처럼 뜨거웠지만 바닷물에 담겨진 두 다리는 얼얼할 정도로 차가웠다. 윗쪽은 뜨거운데 아랫쪽은 이렇게 차갑다니! 몸의 감각이 낯설었다. 일상에서 이런 종류의 자극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발바닥으로 모래를 꾹꾹 누르기도 하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하면서 감탄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시간을 확인했다. 바닷가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3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원래는 기차 안에서 검색했던 유명한 모밀집에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발을 담그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바닷가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서울역에서 맥모닝세트를 대신 김밥 한줄을 사왔던 것이 떠올랐다. 모래 묻은 발로 자박자박 걸어서 바다가 보이는 해송림 그늘 아래 천을 깔았다. 틈날 때 마다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엉덩이 하나 정도는 깔고 앉을 여분의 천이 언제나 가방에 있었다. 바닷바람을 막으려고 조성한 소나무 숲이 해송림이다. 누워 있으니 살랑살랑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닷가에 발을 한참 담궜더니 더위의 기운도 가셨다. 짧게든 길게든 여행을 자꾸 하고 싶은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의 조합들이 선사하는 놀라움 때문이 아닐까. 이 날의 점심은 예상 못한 것이었다. 가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바람에 납작해진 김밥과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 커피! 소나무에 기대서 보는 청록빛 바다 뷰의 조합은 엉망이면서도 즐거워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음번에 강릉에 온다면 즉흥적인 마음보다는 구체적인 작전이 필요하겠다. 계획을 세운다고 다 실천이 되지는 않겠지만 일기예보는 꼭 확인 할 필요가 있다. 얼마전 사놓고 한번도 입지 못한 수영복이 아까우니 말이다. 나는 세시간처럼 느껴지는 한시간쯤을 더 뒹굴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을 때마다 눈 앞에 갈색 그늘이 아른거리는 해송림을 걸어서 택시를 잡았다. 아직도 기차 시간까지는 한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송정 해수욕장에 오면서 보았던 강릉에서 제일 큰 건물처럼 보이는 이마트에 들렸다. 역시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버릇 같은 것이다. 낯선 도시에 가서 익숙한 브랜드의 마트나 카페에 가서 안도감 느끼기 같은 것 말이다. 강릉 이마트는 리뉴얼을 해서인지 내가 사는 동네의 마트보다 물건도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했다. 물이나 한병 사서 나가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팔에 얹고는 최신 기능이 있는 셀카봉을 하나 담았다. 아까 송정 해변에서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집에 있는 것과 동일한 디자인의 식탁매트가 50프로나 세일하고 있길래 그것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품절되어 못 샀던 비행기 모양 미니 레고도 발견했다. 아이가 사고싶어 했던 것이었다. 아아 이러다 오늘 저녁에 먹을 식재료까지 강릉에서 사게 생겼어.



핸드폰에 기차역으로 출발할 시간을 알람으로 맞춰놓지 않았다면 나는 이마트에서 몇시간을 더 배회했을지도 모른다. 잠깐처럼 느껴졌는데 금새 1시간이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늘상 하는 익숙한 경험은 의식적으로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이마트에서의 1시간은 송정 해변에서 뒹굴거렸던 1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르게 느껴졌다. 인간이 시간을 제어할 방법은 없다. 확실한 것은 낯선 시간과 공간에 스스로를 던지면 내 의식이 느끼는 시간은 분명 달라진다는 것, 사소한 것에 감탄하고 크고 작은 자극들에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햇빛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바닷가 탓인지 몸이 노곤노곤했는데 정신만큼은 명료한 상태가 되었다. 아침에 기차에서 세운 계획 중 송정해수욕장 말고는 생각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주 많은 일을 한 것처럼 촘촘하게 흘러간 하루였다. 우연히 만난 풍경들은 나를 감탄하게 했고 발톱에 때가 끼도록 모래를 밟는 일은 놀라울만큼 기분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밀을 먹으러 자리를 뜰 수도 있었지만 찌그러진 김밥과 녹아버린 커피를 마시기로 한 내 신속한 판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셀프 칭찬할 만 한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번복하고 다시 판단하고의 반복이었던 하루였다. 그러고보니 세상에나 맙소사 자기주도적 삶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한 것 외엔 제대로 된 대화라고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하루였지만 그 어느날 보다도 많은 말을 한 것 같은 이유는 아마도 내 스스로와 대화를 많이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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