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옷을 다 챙겨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스페인에서 시작해 남미에서 끝나는 여행에는 넣을 것도 많았고 뺄 것도 많았고 중요하게 챙겨야 할 것도 있었다. 떠나는 전날까지도 짐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평소에도 건망증이 심해서 전화통화로 핸드폰 잃어버렸다고 하소연하는 내가 아니던가. 걱정스레 쳐다보던 남편이 말했다. " 이것저것 다 챙기려고 하지말고 핸드폰,신용 카드,아들 세가지만 잃어버리지 마." 혼자서 아들과 온갖 짐들을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남편의 한마디에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 그리하여 나는 여행 중 복잡한 장소를 가게 되거나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이 오면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1번 안단테! 2번 핸드폰! 3번 신용카드! 다 있나?' 일단 아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공항이나 기차 역 같은 복잡한 곳에서 정신을 팔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했다. 첫번째가 도둑이었다. 도착하는 도시가 소매치기로 유명한 마드리드였으므로 나는 출발하면서부터 주의를 단단히 줬다.
"여기있는 사람들 중 도둑이 있을지 몰라. 도둑은 언제든 와서 뭐든지 가져갈 수 있어. 그러니까 엄마 손 꼭 잡고 아무데나 가면 안된다." 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금 여기에도 도둑이 있어 엄마?" 라고 물었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지금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 분명히 있어."
우리가 가는 곳은 여행책에서 말하는 소위 '소매치기 주의 구간'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조심하자는 의미였다. 5세 어린이는 군것질을 파는 좌판이나 네온사인 같은 것들을 보면 자석이라도 붙여놓은 것 처럼 다가갔기 때문에 그때마다 나는 "도둑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날카롭게 외치곤 했다.
1.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밤거리를 걷던 중이었다. 호텔 근처에는 이국적이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거리를 따라 이어져있었다. 아들은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가죽 신발이며 색색의 숄, 타일을 이어서 붙인 램프같은 소품들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가 장식품들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을때 검정색의 길쭉한 손 하나가 쑥 나타나 아들의 눈 앞에서 엑스 모양으로 흔들었다. 키가 멀대같이 큰 아프리카계 흑인 이었다. 뒤로 메고있는 가방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제 괜찮다는 뜻으로 씨익 웃었다. 노란 조명 아래 있으니 까만 얼굴과 대비되는 하얀 이가 유독 돋보였다. 아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길거리에서 꺼억꺼억 우는 아들을 간신히 달래어 호텔로 돌아왔다.
"엄마. 저 사람 도둑이었어? 도둑은 저렇게 얼굴이 까매? 왜 손바닥만 하얘?"
"도둑이 아니라 또 다른 도둑을 조심하라고 손을 흔든거야."
"물건을 훔친 사람은 검은 얼굴 아니야? 이빨밖에 안보이는데?"
"아니야. 얼굴이 까맣다고 해서 도둑은 아니야."
그러고보니 아들이 아프리카계 흑인을 본 것은 그날밤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2.
그라나다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철길은 오랜 공사로 버스를 탄 후 다시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우리는 안테퀘라(Antequera)라는 시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로 5시간을 이어서 가는 것보다 중간에 기차로 갈아타고 가는 것이 덜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코스였다. 드넓게 펼쳐진 올리브 밭 사이에 위치한 안테퀘라 역은 작은 매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처럼 환승하는 사람들 몇몇만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드리드행 기차는 아무 방송 없이 10분 이상 지연되고 있었고 배낭 두개와 캐리어 하나를 손에 쥔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럴때 다섯살 어린이가 얌전히 있을리 없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플랫폼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기차역에선 위험할 수도 있으니 엄마 옆으로 와."하고 외치고 말았다. 마지못해 옆으로 온 아들이 말했다.
"엄마가 바쁜 것 같아서 내가 도둑이 있나 없나 보고왔어."
"도둑이 어디있는데?"
"저기 수염 많은 사람 도둑 아니야?"
"(한숨쉬며) 수염 많다고 도둑 아니야. 아빠도 수염 안깎으면(저렇게 풍성할 리는 없지만) 저렇게 되는거야."
"그럼 저기 머리 하얀 할머니도 도둑 아니야? 배에 자루처럼 뭐가 엄청 들었는데?"
"아들아. 저건 그냥 똥배야. 그리고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안돼!"
"아이씨, 그럼 누가 도둑이야. 내가 다 둘러봤는데!"
"처음부터 도둑은 아니야. 물건을 훔쳐야 도둑인거지. 얼굴에 도둑이라고 안 써있어."
3.
드디어 아르헨티나에 입성했다. 도착하기 전 다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거리에서는 핸드폰 같은 것은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년 사이 페소화의 가치가 오분의 일 이상 떨어지고 실업률이 높아져서 일을 하는 것보다 관광객을 터는 것이 낫다고 했다. 에코백을 들고 가다 뒤돌아보니 가방끈만 어깨에 달랑 있고 가방의 몸통은 통째로 잘라간 일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플로리다 거리의 환전상에서 1.000불 가까이 환전사기를 당했다고 하기도 했다. 새똥이 떨어지면 소매치기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니 새똥을 맞고 그냥 걸어가라고도 했다. 멀쩡한 성인도 이렇게 눈뜨고 당하는데 5살 어린이와 함께인 나는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어야 했다. 여행 내내 내가 도둑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했는지 아들은 이제 도둑을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꺼내면 심드렁한 눈치였지만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저-어-엉-말 도둑이 많아."
"얼만큼 많은데? "
얼만큼이라고 해야 아들이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줄까 싶어서 최대한 과장해서 말하기로 했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 전부 다 도둑이라고 생각하자. 그만큼 우린 조심해야 해."
"우와아! 우리 그럼 이번엔 진짜 도둑을 만나는거야?"
"도둑 만나면 우린 한국에 못가. 핸드폰도 신용카드도 잃어버리면 비행기도 못타는거야. 밥도 못먹고."
길거리에 도둑이 그렇게나 많은데 만나면 안된다는 말에 사뭇 실망한 눈치였다.
"엄마. 그럼 대체 도둑은 어디있어? 길거리에만 있어?"
"도둑은 어디에나 있지."
"도둑도 돌아갈 집이 있어?"
"도둑도 집이 있지"
"도둑은 그럼 도둑질을 해서 밥을 먹는거야?"
"아마 그럴걸?"
"엄마. 그럼 도둑도 나처럼 엄마가 있어? 가족도 있어?잘 때는 나처럼 베개를 베고 자?"
"...으음.아마 아마 그럴거야. 아마도?"
"만약에 도둑네 집에 나같은 아기가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
"너는 이제 아기 아니거든? 빨리 잠이나 자자."
아들을 재워놓고 생각이 많아졌다. 도둑은 원래부터 도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지. 그러고보니 여행 내내 도둑은 나쁜놈이고 조심하라는 말만 습관적으로 반복했을뿐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많은 도둑 이야기 탓에 아들은 도둑을 '산타클로스'나 '망태기 할아버지'같은 동화 속 등장인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으니 말이다. 아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소다색 빙하나 탱고 공연이나 깎아지른 설산이 아니라 여행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도둑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아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아들은 돌아와서도 도둑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