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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타델레 Jan 28. 2019

여행의 끝


 





  남미 여행이 끝났다. 한 달 하고도 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로 계산된 여행이었지만 삼일이 더 붙는 이유는 시차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한 건 또 있다. 연말에 떠난 여행이다 보니 한 달 사이에 한 살을 더 먹어 버렸다. 새로운 나이에 적응하는 것은 매해 그렇듯 시간이 꽤 걸리겠지. 예상하고도 적응하지 못한 것도 있다. 상가주택 구조로 이루어진 우리 집 특유의 겨울철 공기가 그렇다. 짐을 이고 지고 4층까지 올라와 현관문을 열었더니 여름의 한가운데 있다가 겨울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것이 실감이 난다. 오래된 집은 확실히 춥다. 그래서 이사를 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 특히 겨울철의 거실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두 볼과 손끝이 알싸해질만큼 춥다. 그래도 집은 집이지. 한달만에 돌아온 집은 냉골일지언정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떠나기 직전 바꿔 놓았던 초록색 울 카페트는 거실에 그대로 깔려 있었고, 두어달 전부터 열심히 들여다봤던 남미 여행책은 쳐박아놓은 식탁 사이 틈새에 그대로 있어서 웃음이 났다. 욕실에는 내가 좋아하는 프레쉬 바디샴푸와 로션이 있었으며 여행 중에 그토록 그리웠던 베이지색 리넨 샤워가운도 세탁 해놓은 그 모습 그대로 잘 개어져 있었다.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전용 바디샴푸가 한달전 그 상태로 줄어들지 않아서 기뻤다. 익숙한 것들에 안도했지만 희안하게 낯설어진 것들도 있었다. 거실장 밑에 어지럽게 엉켜있는 각종 충전기용 전선들이 눈에 거슬렸다. 얼굴을 보기 편하다는 이유로 거실 책장 위에 세워두고 지낸 작은 손거울의 위치가 뜬금없이 이상했다. 주방 천장과 냉장고 사이의 납작한 공간에 왜 미역봉지와 신발상자가 올려져 있는지 의아했다. 주방 싱크대 위의 봉에는 S자 고리가 너무 많았고, S자 고리에는 어김없이 냄비와 거름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다이슨 드라이어기는 왜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오디오 옆에 놓여 있는가. 한달 전까지는 그것이 제자리라고 믿었던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이게 나름의 내 로직이었단 말이야?



 
 분명 처음부터 제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사 왔을 때 임시로, 사용하기 편한 위치니까, 혹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해서 등등의 이유로 ‘잠시’ 그 자리에 놓였다가 그것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어 무려 4년째 어정쩡하게 있게 된 것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섭다. 매일 보면 4년쯤 감쪽같이 그 자리에 있어도 그것이 이상한지 어색한지 눈치챌 수 없으니 말이다. 남편은 날더러 정리를 못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그러면 나는 늘 “내가 청소를 못해서 그렇지 정리를 못하는 건 아냐. 내 기준으로 나름의 질서가 있어. 완벽하다구!”  말하곤 했는데 오늘부로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청소 뿐만 아니라 정리정돈에도 그다지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좋아했거나 거슬렸거나 갑자기 낯설게 보였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한달 전 ‘그대로’ 건재하다는 점이다. 여행 중 가장 그리워했던 것들, 아마도 나만 그리워했던 것은 아니었나보다. 내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차가워진 손을 열심히 비비며 주변을 관찰하고 있을 때, 단테도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한달동안 보고 싶었을 장난감들을 만지고 있었다. 내게도 그리운 것이 있었던 것처럼 5세 어린이도 그리운 것이 있었을 것이다.



 
 한달여만에 남편과 나 그리고 5세 어린이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그간 영상통화만 하며 우리를 기다려왔던 남편은 연신 미소만 지었다. 우리도 그랬다. 사실 30시간이 넘는 긴 비행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지만, 이렇게 다같이 누워 있는 것은 확실히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긴 여정이 끝난 것 같았다.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날, 단테가 물었었다. “엄마, 여행은 이제 끝이야?” 그땐 그냥 “응. 마지막 날이야. 내일은 집으로 가는거야.” 라고 답했었는데 그것은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단테가 다시 한번 나에게 “엄마, 여행은 이제 끝이야?” 라고 물어본다면 대답 해야지. “여행은 집으로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침대에 다같이 누워 있는 거야. 그게 여행의 끝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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