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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타델레 Oct 18. 2021

강릉반서울반

어쩌다보니 강릉

강릉에 집을 구해버렸다. ‘어쩌다보니’는 일년 사이 가장 자주 쓰는 말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왜 하필 강릉에 집을 구하게 되었냐고 물으면 “어쩌다보니...”로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리라. 인연이란 이런것일까. 택시기사가 잘못 내려준 이름없는 바닷가에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바닷가 근처를 정처없이 걷다가 발견한 아파트가 바로 지금의 강릉반 서울반 생활을 하고 있는 집이다. 바닷가 근처의 작은 아파트를 보자마자 어떻게 하면 이곳에 머물수 있을까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제주에서 여러번의 한달살기와 일년살기의 경험을 했던 터라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허나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강릉은 제주처럼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월세도 전세도 여의치 않았다. 부동산에 관한 지식이 일천한 형편이었지만 인도 속담을 떠올렸다. ‘하고자 하는 자는 방법을 찾고, 하기 싫어하는 자는 핑계를 찾는다’는 말을 말이다. 선택지는 매매밖에 없었다. 예상치않게 또 한번 큰 대출을 내야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다에 들어갔다 오면 얼굴부터 순해지는 남편은 선뜻 환영의 뜻을 밝혔다. 아이가 어릴때 바다와 산을 다니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두번째 집은 산이나 바다 근처의 작은 마당을 끼고 있는 소박한 주택이었지만, 제주도에서 다양한 형태의 집을 얻어 살다보니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을 짓거나 고치기엔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았고, 외딴 집을 얻어 살기에는 지나치게 겁이 많았으며, 마당을 꾸리기는 커녕 화분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할 정도로 게을렀다. 제주도의 개성있고 아름다운 수많은 카페를 놔두고 즐겨가던 곳은 주차가 가장 편한 스타벅스 드라이브 지점이었다. 제주생활의 결론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깨달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강릉은 주택에 대한 꿈을 버렸다.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살아보자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은 있었지만 여윳돈은 없었던 형편이기도 했다. 반팔을 입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아봤던 집 구하기는 긴팔에 긴팔을 겹쳐 입을때쯤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도 종종 집 구하기는 운과 같아서 소개팅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집을 내놨던 집주인은 수줍게 이런 말을 했다. “제 취미가 청소였어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은지 20여년이 다 되어가는 23평짜리 낡은 아파트였지만 법랑으로 된 하얀색 가스렌지가 아직도 부지런히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주방의 후드도 베란다의 김치냉장고도 화장실의 타일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게 잘 쓴 흔적이 역력했다. 마음에 안드는 부분도 물론 있었다. 인테리어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참기 어려운 체리색 몰딩과 중국집을 연상케하는 빨간색 실크벽지, 콩기름을 먹인 반질반질한 노란 장판, 그리고 옛날 스타일의 반짝거리는 화장실 타일이 그랬다. 그래도 키를 받자마자 텅 빈 집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와아 우리는 또 빚쟁이가 되었다!” 집을 구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아서 그랬을까. 가을이 끝날 때까지 집을 방치했다. 집을 고칠 돈이 없었다. 가구 살 돈도 없었다. 가끔은 와봐야 할 것 같아서 캠핑할 때 쓰던 침낭과 매트, 코펠과 버너 등을 가져와서 임시로 지냈다. 침낭에서 잠을 청하니 아이가 몹시 즐거워했다. 목을 기댈 수 있는 조립식 캠핑 의자를 하나 깔아주니 캠핑이라면 질색하던 남편도 만족스러워 했다. 캠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실내라는 것과 현관문만 닫으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캠핑과 비교하자니 신기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텅 빈 집에서 돗자리와 침낭만 깔고 지내려니 내게 필요한 것을 0에서 리셋하는 기분도 들었다. 집은 있되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이어가던 중 ‘어쩌다보니’ 500만원이 생겼다.  이 집을 구하기 직전 다른 집을 계약했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이 정식 계약 전날 변심을 하는 바람에 부동산 계약파기 위약금 조로 우리에게 500만원을 변상하게 된 것이다. 계약파기가 된 날 “아니 어쩌다가 우리에게 이런일이!” 하며 발을 동동 굴렀는데 어쩌다보니 새 집도 구하고 500만원도 생겨버렸다. 동시에 조바심도 들었다. 내친김에 아파트 단지의 인테리어 공사 가게에 들렸다. 올 리모델링은 2000만원 정도 든다고 했다. 물론 비싸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서울집은 이미 몇배나 더 들여 올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뒤였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침낭에서 일어나 1회용 드립백에 커피를 내리며 생각했었다. 우리의 두번째 집은 인테리어 앱에 나올법한 자랑스러운 집이 아니라 언제든 와도 편한 집이 되어야 맞다고 말이다. 나는 당장 강릉의 옛 지명인 ‘하슬라’를 따서 ‘하슬라이프’라는 SNS계정을 만들었다. 빨간색 벽지와 반짝이는 화장실 타일들을 찍어 적나라하게 올리곤 ‘500만원으로 집 고치기’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다. 내 목표는 근사한 집이 아니라 차선 중 최선을 하는 것이라고 방향을 정해 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과시의 욕망에서 한발짝 벗어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는 전 주인이 썼던 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쓰면서 눈에 거슬리는 몇개만 조금씩 고치기로 했다. 체리색 몰딩은 시트지 기술자를 불러서 아이보리 컬러로 바꾸었고, 새빨간 벽지는 동네 지물포점에서 최저가 합지로 도배만 깨끗하게 해주었다. 솜씨좋은 지인 부부의 도움으로 주방의 가스레인지와 후드는 살리되, 싱크대 나무 문짝과 상판만 바꿨고, 베란다는 틈날 때 마다 흰색 페인트로 칠해 주었다. 버릴까 싶었던 창문의 버티컬도 락스물에 담궈서 닦으니 햇빛을 막기엔 괜찮아 보여서 놔두었다. 갈 때마다 야금야금 일을 하려니 진척이 늦다. 벌써 세번의 계절이 지났고 500만원으로 집 고치기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저번 주말에도 강릉에 다녀왔다. 이케아에서 산 조립용 나무데크를 베란다에 깔아 두었더니 맥주 마시기 편한 공간이 완성 되었다. 베란다 전체를 데크로 깔거나 무리하게 공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얻는 것은 몸살일 뿐이다. 때론 하슬라이프 계정에 근사하게 리모델링한 집 사진을 올리고 싶은 욕망이 들 때도 있다. 그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강릉에서 즐겁게 지내려고 왔지 인테리어를 하려고 온 건 아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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