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페이스 메이커에게 필요한 것
얼마 전 아이가 코로나에 걸렸다. 다행히 크게 아프진 않았다. 이틀 정도 열이 났지만 금세 회복했다. 나와 아내도 진작에 코로나에 걸렸던 터라 재감염이 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아이는 일주일간 집콕 생활을 해야 했다.
격리 해제가 되자마자 아이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 아이와 한강 고수부지로 향했다. 아이는 자전거를 탔고, 나는 아이의 자전거를 쫓아 열심히 달렸다. 아이는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신이 났고, 나는 신이 난 자전거를 따라 가느라 땀이 났다.
아이는 신이 난 와중에도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뒤를 힐끔 바라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를 살폈다. 내가 쳐질 때마다 속도를 늦춰 주었고, 내가 잘 달린다 싶으면 페달을 세게 밟아 주었다. 덕분에 나 또한 힘차게 달렸다. 토요일엔 왕복 8km를, 일요일에는 왕복 10km를 조금 힘겨웠지만 아이가 끌어 준 덕에 잘 달릴 수 있었다.
기록도 안정적이었다. 첫날에는 1km를 5분 20초 정도에 둘째 날에는 1km를 5분 10초 정도에 달릴 수 있었다. 덕분에 개운하게 땀도 한바가지 쏟아냈다. 간만에 제대로 운동한 기분이었다. 혼자 달리면 쉽게 퍼지고 힘들 구간이었는데 멋진 페이스 메이커 덕분에 지치지 않고 좋은 페이스로 상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멋진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 열심히 달리다 보니 최근 내가 도전하고 있는 하나의 일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영어 쉐도잉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대사를 듣고 그림자처럼 따라 말하는 것인 쉐도잉을 엉겁결에 올해 1월부터 도전하게 됐다.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졌었고, 쉐도잉도 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단톡방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도전하게 됐다.
1월부터 시작했는데 하다 말다를 반복하다 보니 5개월차에 접어 들었건만 아직도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단톡방에 있는 대부분의 분들이 이미 다 끝내고 방탈출(?)을 한 상태라서 더 조급했다.
너무 처져 버려 포기하고 싶었다. 이 때 나를 끌어 준 몇 분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속도로 했다, 말았다를 반복했던 분들이었다. 다행히 그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안내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을 따라서 나도 한 페이지씩 마지막까지 피치를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이 밀어주고 당겨준 덕에 아직 한 편의 영화를 끝내지 못했지만 5월 중에는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레이스였다. 함께 했더라도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들만 있더라면 쉽게 포기했을 가능성도 높다. 정말 천만 다행으로 나와 비슷한 속도로 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따라 간 덕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훌륭한 페이스 메이커들이다.
쉐도잉에서도 그랬듯 달리기만 페이스 메이커가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한 도전들에도 항상 페이스 메이커가 존재한다. 나의 다양한 도전들에도 페이스 메이커들의 도움이 컸다. 자처해서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준 분들도 있었고, 내가 알아서 페이스 메이커로 삼고 따라간 사람도 있었다.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그들처럼 될 때도 있었고, 그들이 나를 밀고 끌어 준 덕에 하나씩 성취를 이룬 것들도 많았다.
내가 페이스메이커가 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의 도전을 격려하며 나도 같이 뛰었다. 열심히 격려도 하고 응원도 하며 누군가의 도전을 함께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그리 좋은 페이스 메이커는 아니었던 것 같다. 페이스 메이커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가 있을 터인데 나는 그것을 잘 못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들과 함께 달리며 페이스 메이커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고 반성을 하게 됐다.
페이스 메이커에 대해 생각하며 정리한 좋은 페이스 메이커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총 세가지다.
우선 "밀당"이 필요하다. 좋은 페이스 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밀고 당기기 기술을 잘 활용해야 한다. 따라오는 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지켜봐야 하며 때로는 당근을 주거나, 때로는 채찍질을 해야 한다. 단순히 격려만 하고 잘 한다고 칭찬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자기 스스로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반대로 혼내기만 해서는 잘 따라올 순 없다. 쉽사리 지쳐 포기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적절히 격려하고 비판하고 해야 한다.
두 번째는 관심과 애정이다. 아들이 나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면서 계속해서 나를 돌아봤다. 나의 페이스를 계속 관찰했고 나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를 보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따라오는지를 살펴보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당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반에 관심과 애정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 좋은 밀당이라도 개발에 주석편자다.
마지막으로 페이스 메이커 자체가 실력을 갖춰야 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려면 페이스 메이커가 스스로 페이스를 잘 조절하며 잘 달려야 한다. 페이스 메이커가 제대로 달리지 못하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도 제대로 달리지 못할 수 밖에 없다. 마라톤 대회에서 페이스 메이커가 퍼지는 바람에 당황했단 글도 종종 보기도 했다. 이런 경우 페이스 메이커만 따라간 사람들은 낭패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페이스 메이커가 되고자 한다면 리더로서 사람들이 잘 따를 수 있도록 충분한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달리기가 참 재밌다. 달리면 힘들어 죽겠는데 뛰고 나면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달리기가 힘들어서 다른 생각으로 힘듦을 견디는 것인지 달리기 자체가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달리기를 하고 나면 뭔가 정리 되는 게 생긴다는 점이다.
아들이 끌어주는 레이스를 달리면서 나는 인생의 수많은 페이스 메이커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나 또한 좋은 페이스 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바람 또한 갖게 됐다.
항상 그런 과정을 거치면 나의 단점들이 우선 보이는 것 같다. 내가 페이스 메이커로서 아직은 부족한 면이 많아 보이지만 그것 또한 나를 자극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힘을 내 본다. 좋은 페이스 메이커가 되도록 마음가짐을 다잡아 봐야겠다. 내가 받은 만큼 또 주고 싶으니까.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 아들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