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의볕 Jul 08. 2022

그렇게 무뎌진다

며칠째 장마가 이어진다. 새벽부터 쏟아진 비는 우리 집 야외 베란다에 살고 있는 식물들을 흠뻑 적시고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진 흔적으로 가득한 내 차도 적신다. 유독 온몸이 뻐근하다. 눈을 뜨기 힘들다. 발가락을 한참 꼼지락거리다 벌떡 일어나 본다. 기계적으로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늘 오가는 도로를 달린다. 물티슈로 사무실 책상을 닦는다. 미니 선풍기를 켠다. 커서가 깜박인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비 오는 날을 끔찍이 싫어했다. 내 몸에 물기가 어리는 것이 불쾌했다. 아무리 큰 우산을 써도 사방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빗물이 내 피부와 옷, 가방, 신발에 닿을 때면 기분이 빛의 속도로 구려졌다. 나는 항상 뽀송하길 원했다. 나갈 채비를 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이기를. 완벽주의 성향이 심한 편이라 하여튼 어딘가 훼손되고 어그러지는 걸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무뎌졌다. 평생 싫어하던 게 서른쯤이 다 되어서야 ‘꾹 참고 버틸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졌다. 그래, 머리에 비 좀 맞으면 어때. 신발 좀 눅눅해지면 어때. 안 죽어.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아. 모두가 그렇게 젖고 있어. 한 구석이 축축해진 채로 일도 하고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난다고.     


나이 때문일까? 먹고 있는 약 때문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매사에 진심이었던 20대 초반에는 뭘 싫어하면 끝까지 싫어했는데 이젠 그럴 기력이 없는 걸지도. 좋게 말하면 이해심이 늘었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의 모서리가 둥글둥글하게 마모된 것 같다.     


둥글둥글하면 좋은 것 아닌가? 적어도 나에게는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피곤할지언정 예민하게 살고 싶다. 뜨겁게 미워하고 뜨겁게 아프고 싶다. 불편하게 살고 싶다. ‘모르는 게 약이다’ 보다 ‘아는 게 힘이다’를 믿는 나로서는, 감정의 모서리가 늘 날카롭고 뾰족했으면 싶다. 물론 떠올릴 때마다 괴로운 기억이라면 조금은 희석되어도 좋겠지. 첫 직장에서 날 괴롭히던 선배가 내 책상에 종이를 집어 던졌던 순간이나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아저씨 열댓 명을 위해 믹스커피를 타던 순간, 아빠가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의 1이 사라지던 순간 같은 것들. 막상 나열하고 보니 어느 정도 마음에 간직해 두고는 싶다. 내가 이런 시간을 말 그대로 ‘버티고’ 살아왔다는 흔적 같아서.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격언을 굳이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굳어지지 않았다. 더 물렁해져서 더 많은 걸 흡수할 수 있는 땅이 됐다.     


산책을 할 때면 높은 습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힌다. 머리칼은 볼품없이 축 늘어진다. 물웅덩이에 발이 빠져 찝찝하다. 그래도 걷는다. 불편함을 만끽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