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생겼던 물음이다. 각자 살아온 환경에 따라 누군가는 부모의 소득 수준, 누군가는 거주 환경, 누군가는 가족 구성 형태 등등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모두가 보편적으로 쉽게 떠올리는 기준으로 따지면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핼리-무니 가족은 행복할 수 없는 가정에 가깝다. 핼리는 아이를 도맡아 기를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들은 디즈니랜드 옆 모텔에서 장기거주를 하고, 방세를 지불하는 데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핼리는 무니를 데리고 디즈니랜드 주변을 이곳저곳 오가며 행상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잡혀갈 위험도 여러 번 겪는다. 매 순간 아슬아슬 외줄을 타던 이들이 진정 벼랑 끝에 서게 된 때는 핼리가 방에서 성매매를 시작하는 순간부터다. 무니는 엄마가 틀어놓은 이상한 힙합을 들으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진하게 목욕을 하고 있지만 눈치 빠른 무니가 아무것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난 바로 알아.” 학교를 가지 못해 매일 엄마와 함께 지내는 무니는 엄마를 잘 안다. 어른들은 때로 자신만의 기준으로 아이를 쉽사리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이 모든 장면들을 감독과 배우들이 담담하게 담아낼 때 관객은 시종 괴롭다. 첫 장면에서 무니와 친구들의 되바라진 언행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던 이들은 왜 무니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됐는지, 몇몇의 장면을 거쳐 비로소 알게 된다. 다 자란 어른들이 ‘아이다움’이라는 단어에 욱여넣었던 기준들이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때론 엄마보다 더 어른 같은 무니가 특유의 천진함으로 일상 곳곳에서 분투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다시 행복한 가정의 기준으로 돌아오자.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건 아이들의 웃음 소리다. 무니는 영화 내내 즐겁게 뛰어놀지만 엄마, 친구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울음을 쏟는다.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핼리-무니 가족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불결하고 불행한 곳’이라는 인상만 남겨둔 채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지 말고, 진정한 의미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 아이를 격리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긴 여운 끝에 그나마 선명히 남은 답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만약 악당이 있다면 그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연방 자금 지원 부족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일한 보호자로서 제대로 역할하지 못했던 핼리도, 위급한 순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바비도, 핼리와 무니를 매몰차게 외면했던 애슐리도 악당은 아니다. 진짜 악당은 영화 밖에 있다. 감독은 진짜 악당을 은연 중에 내비치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관객은 실컷 눈물을 쏟고 난 뒤 홀가분함이 아니라 찝찝함을 품고 나온다. 멀리서만 바라보면 진실을 알아보기 어렵다. 디즈니랜드를 가득 메운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간 무니와 젠시가 관객의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니가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 한 입을 젠시에게 양보하는 장면이 유독 마음에 오래 남는다. 우정을 굳이 정의한다면 그런 게 아닐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에도 괜히 마음 한 번 더 쓰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