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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또시 Feb 05. 2024

그 둘의 시작을 훔쳐보았다

엄마 아빠의 연애편지를 읽어본 적 있나요?

엄마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그냥 이00이었던 시절, 

아빠가 누군가의 '아빠'가 아닌 그냥 유00이었던 시절.


우리 집엔 그 시절 두 사람의 소통 기록이 남긴 편지책(약 393쪽)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유00이 이00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인데, 답장 보내기엔 조금 게을렀던 이00가 받은 편지들만큼은 허투루 방치하지 않고 한 장 한 장 살뜰히 모아두었더랬다. 


유00은 군부대 선임으로부터 이00을 소개받았고, 둘은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채 편지만 7개월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다행인 건 그 7개월 간 유00의 작은 키와 까무잡잡하고 한눈에 반하기엔 어려움이 있는 얼굴 대신 재치와 꽤나 짙은 감성으로 빚어낸 문장들이 이00에게 먼저 가닿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가끔 '엄마' 이00은 '그때 얼굴 먼저 봤었으면 지금 너넨 없었을 수도 있어~'하고 농담 섞인 진담을 던지곤 하니까.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나까지 온 가족이 모여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는 날이면 난 책꽂이 한편에 꽂혀있는 이 편지책을 들고 나와 랜덤한 페이지를 펼쳐 그날의 편지를 낭독하곤 한다. 엄마 아빠에게는 그 시절의 풋풋함을 되새길 수 있게, 동생과 나는 부모가 아닌 젊은 남녀로서의 그들을 상상해 볼 수 있게.


아파트 화재를 다룬 뉴스가 흘러나오던 어느 날 문득 '이 편지책이 불 타 없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가보처럼 내 자식, 그리고 그 자식들에게까지 대대로 간직하게끔 하고 싶은데 갑자기 홀라당 사라져 버리면 더없이 허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 몰래 천천히, 한 편 한 편, 온라인 공간에 백업해두려고 한다. 


첫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내용은 그대로 옮긴다. 개인정보는 필요에 따라 삭제하지만 오탈자나 맞춤법은 굳이 수정하지 않고.)




1986년 12월 11일


첫눈도 왔고 만인이 즐기는 크리스마스마스의 황홀함도 얼마남지 않은 계절입니다.

지금 이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당연지사겠지만, 최초의 필자는 두 주먹 불끈쥐고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읍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읍니다.

씨의 이름 석자를 알고, 편지 한 통을 써보내는 것이 무모한 짓거리라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군발이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을 메꾸기에는 무슨 짓인들 못하겠읍니까.

안면이 철판이요, 두 팔이 마징가-Z의 그것인지라, 시공을 초월하는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한가봅니다.

이런 군발이의 심정,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신다면 이 생명 다바쳐서(?) 펜대를 놀리겠읍니다.


    씨 !

감히 이름 석자 불러 보는 것도 외람되 보여 더이상의 언급을 회피해 봅니다. 

인간이 사람을 만났을 때는 자신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일 인으로써의 도리임을 예전부터 부모님의 은덕으로 알고 있는지라, 잠시 지면을 할애해 볼까 합니다.


본인은 일천구백육십삼년 삼월 삼짓날에 아버님, 어머님 사이의 사남 이녀중 막내로 태어났읍니다.

본적은 충남의 한 옛 가옥으로써, 철없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읍니다.

국민학교 일 학년 때 뜻한 바 있어 부모님의 뒤를 쪼아 서울의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했읍니다. 

검은 고무신의 코흘리개 촌놈이 서울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려니, 난감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모든 것을 극복해준다는 평범한 진리를 바탕으로 국민학교, 고등학교, 대학 삼년 간의 시절을 별탈없이 보내고, 대한의 남아라면 한 번쯤은 거쳐가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읍니다.

그러기를 십오개월, 바햐으로 꺽어진 군 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앞에 서술한 내용들이 제 생활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나라는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할 첫 번째 과제랍니다.


    씨!

형태 묘사 좀 해드릴까요.

사실 자신있게 내세울 아무것도 없답니다.

안경하고 저는 실과 바늘사이고, 키하면 뭇 여성들이 같이 있기 싫어하는 짜리몽땅이요,

목소리 하면 돼지 멱따는 소리의 주인공이고, 개성이라고 하면 막걸리를 연상할 수 있는 고리타분 자유주의자라고 할까요.

"껄껄껄"

이름 또한 재미있어서 클 태 부자 부 합쳐서 큰 부자인지라, 과거 조상의 생활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읍니다.


이거 너무 구구절절이 떠들어 댄 것 같아서 죄송할 것 같습니다.

첫 번 만남에 졸필에 지나지 않는 졸구를 늘어놓았으니.


그러나 말입니다.

댁을 개인적으로나마 소개 받고 느낀 바 있어 몇 자 끄적인 것을 양해해 주시고, 넓은 아량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겨울입니다. 

연병장에 나뒹구는 낙엽들이 왠지 스산해 보이는군요.


일천구백팔십육년십이월십일일

유태부




편지책을 펼치는 날이면 늘 한 번은 읽고 넘어갔던 첫 편지. 언제 읽어도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오곤 한다. 편지에서 딱 하나 거짓말이 나오는데, 그건 20대 초반 짜리 몽땅한 안경잡이 군인 유태부는 사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를 꽤나 잘하는, 어마어마한 왕 베이스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편지 다음엔 목소리로 이00을 반하게 만들었다고 하니까)


굳이 저렇게 자신을 깎아내린 건 실물을 보기 전까지 기대치를 최대한 낮춰두기 위한 고오급 기술이었겠지. 

그렇지만 저 문장은 오히려 이00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반어법으로 이해해 너무 잘생긴 사람이면 어떡하나 걱정하게 만들었었다고 했다. 둘 다 꽤나 N인 인간이었던 듯싶다. 


아쉽게도 이 편지에 이00이 어떤 답장을 보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음 편지 내용을 보면 분명 소통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편지책을 낭독할 때에도 '내가 그런 말을 썼었니? 껄껄껄'하며 마주 보고 웃어대는 사람들이니까.



첫 편지의 마지막장 원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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