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산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yisinpain Mar 25. 2019

초록 물들이기


"J! looks so nice! you did well!"

첫 스티칭 이후 장정 두 시간 만에 내 손 남짓한 티 타월을 완성했다.

무슨 저 네 변을 꿰매는 데 두 시간이 걸렸냐고 비아냥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고교 시절 가정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모두 엄마의 몫으로 돌렸던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불현듯 저 티 타월 하나로 내 성격을 어림짐작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행을 고민해본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흰 천에 초록 물을 들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빳빳한 흰 천을 준비해야 하고, 물이 잘 들 수 있는 질기고 수분이 많은 잎을 골라야 하며, 단단한 숟가락과 적당한 온도의 물 그리고 적절한 햇빛이 필요하다.

참 애매한 재료들이 요구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재료는 함께하는 사람이다.

사실 재료를 구해 숟가락으로 잎을 두들겨 천에 물을 들이고, 물로 헹궈 햇빛에 말리면 되는 아주 간단한 과정이다. 굳이 같이 작업할 누군가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각자 지니고 있는 흰 천에 같은 색의 초록물을 들이고 싶었다.

우리는 원단 가게에 들려 각자 고른 천을 만져보며 어느 천에 물이 잘 들지 비교하고 느닷없이 엉뚱한 천을 집어 들어 당장 이 원단을 사서 옷을 만들어주겠다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집 앞 공원을 쏘다니며 잎과 꽃잎을 찾아다니다 햇볕에 취해 발라당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우리는 아무리 허브 잎을 두들겨도 물이 안 들자 남은 잎을 더운물에 띄어 차를 만들어 마셨다.

내 친구는 물이든 천을 햇볕에 내놓고 돌아오는 길에 책장에서 앨범을 꺼내 그동안 찍은 나무와 풀, 꽃 그리고 동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녀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바느질 도중 고양이 한 마리가 반쯤 열린 대문으로 들어와 반복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정말 떨렸다. 지금껏 다수의 현지인들을 한 번에 마주한 적 없었던 나는 '다들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따위의 상투적인 문장들을 머릿속에 끝없이 늘어놓으며 한 건물로 향했다. Melbourne International Art Festival 자원봉사자들의 첫 미팅이었다. 차가워진 손으로 내 손 보다 더 차가운 문을 밀어 열었다. 다행히 공기는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많이 편안했다. 50명쯤 되어 보이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빈자리와 함께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한 친구를 찾았다.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그 자리에 앉고 곧이어 시작된 안내 교육을 들었다. 그렇게 그 친구를 만났다.


그 뒤로 우리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자연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그 친구를 따라, 우리는 가까운 공원에 찾아가 낮게 자란 풀 옆에 누워 줄지어 비행하는 새들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고, 일정한 간격으로 떼를 지어 다가오는 파도를 들었으며 친구가 직접 만든 파스타 면에 기름을 대충 둘러 잘게 뜯은 꽃잎과 함께 버무려 먹었다. 초록물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이따금씩 그 친구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한참 따라가 보면 항상 그때의 내 시선은 내 책상 위 스탠드에 걸려있는 저 티 타월에 멈춰있다. 그 친구는 여전히 함께 숟가락으로 잎을 두들기던 순간을 기억하며 나에게 고마웠다고 말해준다. '티 타월 만들기'가 그녀에게 메모러블 한 추억을 선물해주기 위해 의도한 이벤트는 아니었으나, 함께이고 싶은 친구와 함께 초록물이 든 내 마음을 기록할 수 있었음에 행복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이 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