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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쌤 Mar 28. 2022

너머의 것은 너머에

가끔은 철학자가 됩니다(10)

“한 할머니가 버스에서 넘어졌답니다. 그러자 어떤 젊은 남성이 다가와 그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심지어 젊은 남성은 다친 노인에게 돈을 주며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서로 연락처도 교환했지요. 그리고 2주 후. 법원으로부터 남성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할머니가 이 남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것입니다. 왜 젊은 남자가 날 도와줬겠느냐? 정상인이라면 노인을 도와주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도와준 이유는 나를 밀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 할머니의 소송 이유였습니다. 결국 법원은 할머니의 편을 들어주었고 젊은 남성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그처럼 친절하지 않다. 그는 할머니를 밀어 넘어뜨렸고 그 죄책감 때문에 할머니를 도와준 것이다, 라는 것이 법원의 논리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선한 일을 했음에도 그것이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오도되어져 버렸다.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을 움직이는 수많은 환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곧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환상이 우리의 삶 곳곳에 존재한다.


<그레이트 뷰티>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저 너머엔 너머의 것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지 않는다.” 또한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환상과 허상들에 맞서서 싸우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해답들이다.


키치(kitsch)적 태도. 스스로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 하는 윤리적으로 부정한 태도. 예를 들어 백만장자의 가정용 엘리베이터 안에 걸린 진짜 렘브란트의 그림이 바로 그렇다. 진짜 렘브란트 그림을 엘리베이터 안에 건 백만장자의 행위에서 자신의 부와 고급 취미를 과시하기 위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사회와 사회 속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말이 있다(슬라보예 지젝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결국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윤리적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서 바라보고 있는가'일 것이다. 나의 사회적 위치, 경제적 여건 등등.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라고. 지금 당신이 위치한 곳은 어디인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체에서 어떤 부분으로 일하고 있는지. 내 위치를 알고, 어디에 서서 어떤 식으로 관점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 어쩌면 교육은 바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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