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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Jan 27. 2024

유감(遺憾)에 대한 유감(遺憾)

정치적 단어로  변질된 단어, 유감(遺憾)

유감(遺憾), 이 단어 언제 어떻게 왜 쓰세요?

() 민주, 국회 상임위 줄줄이 취소여당 대단히 유감

(뉴시스, 2023. 9. 18.)  

   

() 경찰청장, 강남 마약 모임서 숨진 강원 경찰관 사건에 유감 표명

(강원도민일보, 2023. 9. 18.)     


유감’이라는 말만큼 화자(주체)와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는 단어는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언어 표현의 모호함일 수도 있고 함의(含意)의 다양성일 수도 있습니다. 위의 (가), (나)에서 사용된 유감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다르게 이해됩니다. (가)는 민주당이 국회 상임위를 취소한 것에 대한 여당의 ‘불만’, ‘항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 비해 (나)는 경찰의 수장인 경찰청장이 조직의 구성원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렇게 같은 단어가 상황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있는데 사전의 정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 유감(遺憾):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예] 유감의 뜻을 표하다.                         


우리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에 비해 사전의 해석은 너무 한쪽의 쓰임에 치우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의 뜻풀이에 따르면 (가)의 의미는 이해되지만 (나)와 같이 ‘사과’의 뜻을 전할 때 사용되는 맥락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가 잘못된 걸까요?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유감’을 ‘사과’의 뜻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교나 정치 분야에서 특정한 용법으로 쓰이면서 더욱 그러한 쓰임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유명인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개인적 발언에서도 종종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정치 언어의 특징을 고려해 볼 때, 국가와 국가 간의 소통에서 직접적인 의미를 담은 ‘사과’, ‘사죄’와 같은 단어는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표현해야 할 상황에서도 우회적 표현을 선호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 이 ‘유감’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유감은 사과의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유감’은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할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잘못을 하긴 했지만 ‘죄송하다’,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이 유감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느낌까지 줍니다.


유감의 한자를 살펴보면 ‘남길 유(遺)’에 ‘섭섭할 감(憾)’을 쓰고 있기에 이러한 의문은 더욱 짙어집니다. 단순한 느낌을 뜻하는 한자인 ‘감(感)’이 아니라 섭섭함이라는 분명한 감정을 뜻하고 있는 ‘감(憾)’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화자의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에 합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조직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경찰청장이 ‘사과’를 표명했다면 진정성이 더욱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잘못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전하는 것이 반드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손해만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경우에는 솔직한 표현에 더욱 마음이 끌리기도 하니까요.   

  


<문해력이 쑥쑥, 한 줄 요약>

유감(遺憾)은 불만과 항의의 뜻을 표할 때,

사과의 의미로는 외교 분야 등 특수 상황에서만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잠깐, 더 읽고 갑시다>

노암 촘스키, “언어는 권력의 도구이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는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학자입니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모든 언어가 공통된 언어 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지식을 활용하면 무한한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생성 문법(Generative Grammar)’이라는 이론을 개발하였습니다.

  한편 촘스키는 언어학 외에도 정치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요.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언어와 정치(Language and Politics)>에서는 언어와 정치의 상관성을 강조하면서 언어를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언어가 사회와 정치적인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며 정치적 메시지와 사회적 통제를 전달하는 데 사용됩니다. 즉 언어가 권력 행사의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 언어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유지하는 데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정치와 언어의 상관성만을 강조한 것뿐만 아니라 언어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신중함이 요구된다고 보았으며 그 사용은 책임을 동반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촘스키의 주장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정치적 장면들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일본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바다로 방류한 물을 가리키는 표현은 오염수, 처리수, 오염 처리수 등 다양한데요. 여기에는 각 정치집단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유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이러한 표현에 대한 각자의 판단과 수용이 필요합니다.


* 이 매거진의 글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헷갈리는 단어를 중심으로 그 차이점들을 짚어 보자는 기획 아래 집필하고 있는 글입니다. 대개 중학생 정도의 수준에서부터 일반인도 까먹었을 법한 어휘나 문법 지식도 나올 수 있습니다. 부담 없이 읽다 보면 국어 문법 지식도 함께 이해할 수 있길 바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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