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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Mar 15. 2024

삶에 정답이란 없다, '세속'과 '고답'

세속-고답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혹시 아시나요? 바로 2019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대한 한 평론가의 한 줄 평입니다. 이 한 줄 평은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된 영화만큼이나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대중 평론가가 명징, 직조, 신랄, 처연과 같은 대중이 흔히 쓰지 않는 단어를 일부러 선택하여 작품과 대중의 소통과 이해를 가로막았다는 불만 아닌 불만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 평론가는 다소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감상과 평가를 가장 적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단어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골라 쓴 것일 테니까요. ‘분명하게’, ‘명료하게’와 같은 단어보다 ‘명징하게’를 선택한 이유, ‘엮어낸’보다 ‘직조해 낸’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선택했다고 비난하기보다는 그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음미해 보며 영화를 되새겨 보는 것이 어땠을까요. 숨어 있는 단어를 새로이 발견한 기쁨 또한 문해력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이번에는 가히 그 한 줄 평에 비견되는 어떤 시인의 한 작품에 대한 소개를 읽어 보면서 여기에 사용된 두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세속 세계에 대한 혐오감과 고답적인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시인상을 대비적으로 노래한 작품  

   

● 세속적(世俗的): 세상의 일반적인 풍속을 따르는 것.                    

[예] 세속적인 가치.

● 고답적(高踏的): 속세에 초연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것.

 [예] 세상 물정 모르는 고답적인 선비.     


한 줄 소개만 읽었을 뿐인데 시와 시를 쓴 시인이 무척 궁금해지네요. 반의어를 활용한 압축적 소개가 인상적입니다. ‘세속’과 ‘고답’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면 작품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대략 떠오를 수도 있기도 한데요. 바로 백석 시인의 ‘광원’이라는 작품에 대한 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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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曠原)

    

흙꽃 니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가정거장(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흙꽃: 흙먼지

*니는: 일어나는

*무연한: 아득하게 너른

*경편철도: 기관차와 차량이 작고 궤도가 좁은 철도

*가정거장: 임시 정거장

*새악시: 새색시

*나린다: 내린다


출처: <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문학동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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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제목인 광원은 넓은 평원을 의미합니다. 백석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인근에 멀리 바다가 보이고 경편철도가 지나는 평야가 있었다는데요, 이 시의 ‘광원’은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편철도는 산업화되어 가는 시대의 신문물이므로 세속적인 것을, 노새는 무거운 짐과 먼 길에 잘 견뎌주던 가축이므로 과거 지향의 고답적인 것을 상징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답(高踏)’은 ‘높다’는 뜻의 고(高)’에 ‘밟다, 디디다’의 뜻을 지닌 ‘답(踏)’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입니다. 높은 곳을 밟는, 즉 현실과 동떨어진 것에 대한 지향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반드시 주의할 것은 ‘세속’과 ‘고답’ 모두 그 대상이 지닌 속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낼 때 자주 쓰인다는 것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세속’을 검색하면 나오는 예문만 보더라도 그러한 쓰임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타난 '세속'의 정의

‘세속’은 ‘떠나’고, ‘시달리’고, ‘등지’는 대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세상’, ‘세계’와 같은 ‘세속’의 유의어들은 그러한 쓰임을 보이지 않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러한 쓰임새를 이해하면 이 단어를 더욱 적절하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고답’의 경우도 ‘현실과 동떨어진’이라는 그 뜻풀이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맥락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학의 구조조정 문제를 논하는 한 교육전문가의 글 속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학이 고답적인 도덕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세속적인 이해 관심에 좌우되는 공리주의에 지배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서울신문, 2005. 3. 17.)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을 보여 주는 두 단어가 모두 부정적 맥락에서 주로 쓰인다는 것은, 어쩌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나 삶의 자세란 좋은 것만은 아니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적당히 이상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는 세상의 통념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문해력이 쑥쑥, 한 줄 요약>

세속적인 것은 이 세상의 일, 고답적인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일,

실제로 쓰일 때는 주로 둘 다 지양해야 할 태도로 부정되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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