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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명사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참사, 라는 단어 뒤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by 구름 수집가

명사는 동사에 비해 간결하고 추상적이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함의하는 포괄성을 지닌다. 그래서 뉴스나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자주 활용된다.


이 기사의 헤드라인은 모두 명사로 이루어져 있다.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 없고 군더더기 표현도 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명사형 표현에는 시제도, 높임도, 문법적 상(相)도 없다. '잔디밭 출입 금지'라는 표현에는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합니다.'라는 표현에 있는 구체적 행위에 대한 묘사와 존칭의 종결 표현이 없다. 형용사나 동사가 없이 명사로만 전달되는 뉴스 헤드라인은 그래서 딱딱하다. 아래 기사의 헤드라인은 '차분하다'라는 형용사와 '이어지다'라는 동사의 활용형이 사용되었다. 만약 기사가 '제주항공 참사 함동분향소 추모 행렬 계속'으로 표현되었더라면 좀 더 삭막하고, 적막하고, 황폐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명사적 표현은 그래서 단정적이고 때로 폭력적이기도 하다. 수학을 정말 '잘하는' 아이수학 '천재'로 표현될 때 진실이 감춰지거나 과장되는 것처럼. 어떤 것을 명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대단한 언어적 감수성과 논리성을 요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표현한 명사는 때로 불만족스럽다. 내가 느끼는 고통스러움, 숨 막힘, 힘겨움, 허망함, 이 모든 동사와 형용사가 '참사'라는 명사로 표현되는 것은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

여행을 떠나 본 사람,

태국이라는 어느 이국에 다녀와 본 사람,

휴가를 떠나 본 사람,

가족이 있는 사람,


비행기, 여행, 태국, 휴가, 가족, 이 단어들은 곧 슬픔이 되었다.

이 명사들 중 하나에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두려움이 눈앞의 현실로 생생한 공포가 되었다.


이것은 그저 '공감' 때문일까? '사랑'만큼이나 흔한 단어가 되어 버린 공감, 공감, 공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지나친 공감으로 공황을 경험한 나는 이 사태에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며 내 감정이 이렇게 힘든 이유를 애써 담담히 생각해 본다. 자기 심리학(Self Psychology)에서 공감은 대리적 성찰, 즉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에 들어가서 가능한 한 온전히 상대방을 느끼고 생각하는 어렵고 느린 과정이라고 한다.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은 공감의 개념을 확장하여 공감을 다른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 방식,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본다. 한편 이기적 유전자로 이루어진 인간이 타인의 슬픔에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의 개념을 확장했기 때문이라는 연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기적 인간이지만 '나'의 개념을 확장하여 타인의 경험에 들어가 참사 속 그들을 온전히 느끼고 생각하며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이 '참사'라는 명사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타인의 주관적 경험에 내 몸을 던지는 위대한 감정 '공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흔한 단어가 되어 버린 '공감'만으로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형용하기가 힘들다. 공감이 그것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면 '연결'은 어떠할까. '우리 각자의 존재는 다른 이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내가 이 참사에 그토록 슬픔을 느끼는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저 단어들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 희생자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단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이 참사를 설명하는 저 흔한 명사들로 고리를 걸어 그들과 연결하여 확장하며,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애끓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 딸을 떠나보낸 한 아버지가, 아주 멀리 시집보낸 거라고 생각하려 한다는 그 말속에도 차마 놓지 못한 애절한 끈이 있다. 이 끈이 우리를 자꾸만 그곳으로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