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10박 12일의 기록 02
뉴욕에서 가장 기대했던 게 있다면 바로 센트럴파크다. 맨해튼 한복판에 올림픽공원의 2배가 넘는 면적을 차지하는 그곳. 맨해튼에서 가장 땅값이 비쌀 도심 중앙에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거대한 공원을 만들다니, 뉴욕은 대체 어떤 도시일까? 더 궁금하게 만든 이유였다.
뉴욕에는 센트럴파크 말고도 워싱턴 스퀘어 파크, 브라이언트파크, 유니온 스퀘어 등 공원이 많은데 겉에서 보면 참 숨가쁘게 돌아가는 대도시일 것만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또 한없이 여유로운 공원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양면의 얼굴을 가진 뉴욕, 참 매력적이다.
뉴욕에서 보내는 셋째 날, 드디어 센트럴파크에 가는 날이다. 요 며칠 날씨가 흐렸는데 날씨마저도 얼른 공원에 가라고 떠미는 듯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뉴욕 관광의 클리셰지만 뉴욕에 가면 꼭 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베이글을 포장해 센트럴파크에서 피크닉 하기. 미리 알아둔 베이글 맛집에서 베이글을 하나 포장해다가 센트럴파크로 향했다.
센트럴파크 입구에 도착하니 울창한 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고 그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지며 감탄만 나왔다. 센트럴파크는 정말이지 잘 가꿔진 대자연 그 자체였다. 그렇게 공원을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한쪽에서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며 공원을 달리는 사람들 무리가 연속해서 보였다. 뭐지? 뉴욕에 러닝 하는 사람들이 많다곤 들었는데 이렇게 많을 수가? 갸우뚱하던 참에 중간에서 그들에게 물병을 나눠주는 사람들,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숨 가쁘게 뛰어가는 그들을 보며 '아, 마라톤이 열렸구나!' 깨달았다. 마라톤이 열린 날 센트럴파크에 오다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없다.
센트럴파크에는 쉽 미도우(Sheep meadow)라는 드넓은 잔디밭이 있다. 거대한 나무들이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고 정중앙엔 푸른 잔디가 광활하게 펼쳐진 곳. 센트럴파크의 피크닉존과도 같아서 많은 이들이 여기에 와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거나 책을 보거나 가족들과 가벼운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늘 센트럴파크에 온 이유도 바로 쉽 미도우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오늘은 쉽 미도우 입구가 굳게 닫혀있었다. 나도 이곳에 누워있을 심산으로 왔건만! 찾아보니 운영시간이 오전 11시부터 라길래 '아직 시간이 안 돼서 그런가 보다' 하고 기다려봤다. 하지만 11시가 지나도 잠긴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아마 마라톤 때문에 이탈자가 생길까 봐 닫아둔 게 아닐까? 추측해 보며.
어쩔 수 없이 그 앞 벤치에 앉아 한없이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포장해 온 베이글을 먹었다. 배가 좀 차자 눈앞 풍경이 눈에 더 들어왔다. 거대한 숲과도 같은 센트럴파크에서 마라톤을 뛰는 뉴요커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운동과 자연으로 아침을 시작하네, 진짜 좋다'. 난 지난 주말 한국에서 넷플릭스로 나는솔로 16기를 보면서 아침을 시작했는데 하하. 저렇게 아침을 보내면 어떤 기분일까?
옆 벤치에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커플이 앉아있었는데 강아지를 무릎에 앉혀두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주인에게 끊임없이 애교부리는 강아지를 안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들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미디어가 아닌 자연, 운동, 동물, 대화와 함께 시작하는 주말 아침. 얼마나 좋을까? 그간 미디어로 아침을 시작했던 날들이 떠오르며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자연과 함께 아침을 시작하겠어' 다짐한 순간이었다.
베이글을 다 먹고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며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렉기타와 드럼 반주에 맞춰 Guns N' Roses의 'Sweet Child O' Mine'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이 노래 나 진짜 좋아하는데! 더 가까이 다가가자 무대 위에 한 명은 운동복, 다른 한 명은 무대용 의상을 입은 채 상반된 모습으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노래에 맞춰 몸을 가볍게 움직이거나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는 모습. 무대를 즐기느라 바쁜 아저씨 옆에선 산책 나온 강아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앉아있고.
'이게 다 대체 뭐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있는데 무대 주변 천막을 보니 마라톤 행사명이 쓰여있었다. 아! 마라톤을 기념해 열린 무대였던 거다. 마라톤 구경에 더해 라이브 무대까지 즐기는 행운이라니! 이게 다 오늘 센트럴파크를 오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광경이다.
그날의 센트럴파크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현존이었다.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는 순간. 자연을 만끽하고,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이고, 같이 온 남자친구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너무 좋다'라고 얘기하며 한없이 웃었다. 아무런 걱정도 조급함도 없이 지금 눈앞의 광경에만 집중하며 보낸 시간이라 그런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다.
그간 주말 아침 침대에 누워 핸드폰 속 무의미한 스크롤을 반복하거나 언제라도 다시 볼 수 있는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보면서 보낸 날들이 떠오른다. 이젠 다른 방식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싶어졌다.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것들을 하며 그것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집 앞 공원을 산책하거나 선선해진 가을 날씨를 즐기며 낙엽을 밟아보기도 하고, 몸이 찌뿌둥하다면 운동을 하거나 그마저도 무리라면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것도 좋겠다. 더 생동감 있는 아침 시간을 만들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