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량 Dec 28. 2023

세밑그늘

이사, 새 동네 적응, 이상하게 따뜻하던 날씨. 나는 꽃눈을 키우던 가여운 목련도 보았다. 그러더니 하룻밤 새 말도 안 되는 한파가 몰아닥쳤다. 마침 연달아 송년회가 잡힌 주말이었다. 단단히 무장하고 나섰으나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온몸이 꽁꽁 얼었다. 발에는 이미 감각이 없고, 모자로도 막을 수 없던 코과 볼은 벌겋게 터져나갔다. 차라리 냉장고가 더 따뜻하단 말은 몹시 일리있었다. 지하철에서 잠시 녹인 몸은 역 밖을 나서기 무섭게 다시 얼어붙었다. 세찬 바람 속 녹였다 얼렸다, 다시 녹였다 얼렸다. 제대로 된 과메기 여기 있어요.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하지만 을지로에서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앞에서 연거푸 맥주를 들이켠다. 이글루스 시절부터의 오랜 인연이자 이제는 독일 선배님인 S 님과 C 님. 원래 노포를 좋아하고 평냉에 미치는 우리건만, 날씨가 날씨인지라 독일식 호프집으로 안내하는 C 님. 독일 소세지와 함께 오비 맥주를 꿀떡꿀떡 넘기기 시작하는데, 마무리는 닭강정과 부추김치로 끝나는 그런 저녁. 독일살이 이야기도 많이 듣고, 꼬마를 위한 어드벤트 캘린더도 선물 받았다. 그것도 손수 제작한!


다음 날엔 20년 지기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각지에 흩어진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중간 지점으론 현충원이 제격이었다. 순국선열과 우정을 함께 기릴 수 있는 분신사바나잇이랄까. 그럼 가까운 노량진은 어때? 하다 예약하지 않으면 활어회 포장을 안고 자리가 나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후기에 한 발 물러서기로 한다. 그러면 사당 어드메서 보자구.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방어회를 그것도 무려 특대를 시켰으나 그 방어는 참으로 방어답지 못했고, 특대라는 호칭도 무색했다. 이에 실망한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너무 추운 나머지 그냥 마주치는 가게를 고른다. 여기도 번화가의 그저 그런 밥집 아닐까 싶었으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코에 훅하고 달려드는 진한 들깨냄새. 아, 제대로 찾은 것 같아.


그래서 방금 명목상의 방어회 특대를 먹고 왔지만 마치 그런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감자탕을 시키고, 라면 사리를 시키고, 다 같이 등뼈를 뜯다가 밥도 볶았다. 나는 떨쳐 일어나 냄비 바닥을 득득 긁었고, 얘들아 철분 섭취 많이 하렴, 하고 다정한 덕담도 했다. 많이 떠들고 웃었다. 그러는 사이 목소리는 기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처음엔 목을 긁는 쇳소리가 났다. 조그맣게 말할 때는 그럭저럭 들을만했으나 슬쩍 볼륨을 키울라치면 음정이 제 마음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는 오선지와 음표. 그런 게 자꾸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우화 속 개구리, 남몰래 비밀을 삼킨 기분이었다.


강추위 속 자정까지 놀다 들어와서만은 아니었다. 충분히 몸을 녹이고 따뜻한 차를 계속 마셔주고 감기약도 알뜰히 털어 넣었다. 급기야 수액까지 맞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일그러졌다. 뒤틀리고 구부정한 목소리. 까끌까끌하고 거뭇거뭇한 목소리. 3일간의 곡이 끝나고 난 뒤의 상주 목소리 같달까.

반가운 만남과 환담 사이 그간 내내 곪아있던 상처가 터졌다.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일들. 정말이지 상주가 된 느낌이었다. 실수, 질책, 항변, 미움, 회한 이런 마음들이 휘몰아쳤다. 날 세운 채 달려드는 말들을 참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참았다. 나까지 풀어제끼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내겐 이제 연극 같은 곡도 사라졌구나. 영원한 미결, 영원한 숙제. 며칠의 침묵 후 생일용돈을 부쳤다는 엄마의 메시지를 읽자 말자 바로 답장했다. 돈 다시 보냈고요, 서울 오지 마세요. 엄마는 답이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달 살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