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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Feb 15. 2024

나랑 같이 잘 사람?

방배정 게임과 일만 동의 팁

남루하고 지친 몰골, 그러나 표정만은 밝은 우리들. 다들 그대로 꼬박 잠들 것이 두려워 밤을 새운 상태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출국장으로 향한다. 가는 길, 부랴부랴 약국에서 마스크와 멀미약도 산다. 아마도 전국에서 제일 비싼 게 분명한 공항약국에서. 그만큼 출발까지 이르는 여정이 다들 바특했다. 마감을 치고 오느라 바쁘기도 하고, 시스템 오픈으로 분주하기도 했던 친구들. 그러면서도 야무지게 면세물품 수령도 완수하는 친구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여행을 앞두고 급히 구입했다는 썬글라스가 어째 다 똑같다. 나란히 앉은 셋이서 같은 브랜드, 같은 디자인의 썬글라스를 쓰고 있다. 이후의 여정에서 셋은 비슷한 대사를 외치곤 했다. 이 썬글라스 내 건가? 그러면 다른 이들이 대답했다. 그냥 암꺼나 껴. 같은데 뭐.


다행히 연착은 없었다. 얕은 좌석에 구겨질지언정 제 시각에 출발해 알맞게 착륙한다.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함. 캐리어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화장실에서 옷도 갈아입는다. 반팔, 반바지에 샌들 차림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2월의 베트남이다. b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아저씨를 따라 차에 오른다. 하늘은 푸르고 길가엔 야자수들이 서 있다. 이윽고 7명이 우르르르 마사지샵에 들어선다. 이름 모를 풀과 라임 조각이 떠있는 대야에 발을 담그고 주스를 마시며 노닥거린다. 90분의 아로마 마사지, 헐벗은 채로 나란히 엎드려 극락으로 가는 길.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킥킥거린다. 원래 마사지라면 사족을 못 쓰긴 하지만 이 마사지는 각별했다. 시장이 반찬이듯, 진한 피로가 감동에 감동을 더했다.

한결 맑아진 얼굴로 우리는 호텔로 향한다. 도로는 한산하고 파란 하늘 위 구름은 무심하게 떠 있다. 날씨 너무 좋다, 우리 중에 날씨요정 있나 봐. b는 여행할 때면 늘 날씨운이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런 b의 불운을 누를 만큼의 요정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행 내내 그랬다. 해는 쨍쨍한데 습도는 높지 않은 날씨. 1월부터 접어든다는 베트남의 건기는 지친 관절을 노곤하게 만들어주었다. 오후 두 세시가 지나면 햇살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늘에 있으면 땀도 안 나는 날씨. 맥주는 언제라도 환영인 그런 날씨였다.

버기카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따라라라란~따라라란~' 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체 언제쯤이면 러브하우스 노래를 안 부르며 문을 열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우리는 모두 탄성을 질렀다. 미국 교외의 주택 느낌이랄까. 그보다 파주 영어마을 느낌에 살짝 가깝긴 했으나, 널찍한 공간과 쾌적한 모습에 다들 눈이 돌아갔다. 1층엔 수영장과 바로 연결된 방으로 킹사이즈의 침대도 있다. 2층엔 3개의 방이 있다. 2개의 방은 테라스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이다. 그중 하나엔 욕조도 딸려있다. 마지막 1개는 테라스도, 전망도 딱히 없다. 4개의 방을 둘러본 후 우리는 거실에 모였다. 7명이니까 둘, 둘, 둘, 하나로 나누면 되겠지. 자, 이제 방배정을 시작해 볼까. 각자 마음에 드는 방이 있는 눈치다. 나 역시 그러했다.


사다리게임이란 방법도 있건만, 요상스런 방배정 게임을 만들고야 만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한 다음, 그 순서대로 자기가 묵고 싶은 방에 가는 거다. 그럼 두 명이 다 차면 그 방은 선택 불가야? 내가 물었다. 아니지, 그럼 걔들끼리 다시 정하는 거지. 가위바위보에서 다 지는 바람에 꼴찌 순번이 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영 불리하진 않겠는데? 누가 어느 방에 가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 우린 부엌에 딸린 작은 방-솔직히 그냥 창고에 불과한-에 모인다. 이제 한 명씩 출발할 차례다. 난 혼자 쓰는 방 하고 싶어, 테라스도 전망도 없는 그러나 혼자 킹사이즈 베드를 차지할 수 있는 방에 꽂힌 나는 입을 나불거린다. 내 진심을 모르는 친구들은 언플하지 말라며 입을 다물라 한다. 한 명씩 친구들이 떠난다. 나도 드디어 골방에서 나와 조심조심 층계를 오른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아무도 없다! 나이스! 이 방은 내 것이다! 다시 거실에 모여보니 한 방에 셋이 모인 방이 있었다. 그래서 재배정이 시작되었다. 방이 정해진 이들은 껄껄 웃으며 보는데, 다시 정해야 하는 넷의 얼굴은 진지하다. 이번엔 가위바위보, 하나 빼기를 하는데 여기서도 온갖 소란이 이어진다. 동시에 양손을 내는데 같은 걸 내는 사람은 대체?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나는 그 광경-괴성과 우격다짐, 우기기와 조르기-을 마음 편히 촬영하고 있었다. 껄껄껄, 이제 다들 정해졌니? 이제 짐을 풀기로 한다. 나는 3일간 홀로 쓸 방에 들어서 그 호젓함과 호사스러움에 감격한다. 실내용 슬리퍼도 2개, 외출용 쪼리도 2개, 옷장도 무려 2개다. 베개는 6개나 된다! 짐을 모두 정리하고서 다시 거실에서 만난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자고.

어제저녁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대충 헤아려봐도 스무 시간의 공복이었다. 굶어도 지나치게 굶은 감이 있다. 뭐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오직 미니바 빼고. 일말의 이성에 기댄 채 우린 밴에 오른다. 4시간 예약해 놓은 렌트카라고 한다. 렌트카라고 하기에 운전은 내가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y는 기사님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y는 여행에서 생기는 약간의 궂은일, 짐가방을 옮기거나 대신 들어주거나 하는 일들을 남몰래 해왔다. 야야, 우리 y한테 팁이라도 줘야겠다. 앞으로 3박5일 잘 부탁합니다. 10,000동 어떻습니까? 모두들 찬성하고 y는 좋다고 수긍하다 이내 깨닫는다. 10,000동을 환산하면 대략 500원 조금 넘는다는 것을. 야, 주지 마. 주지 마. 5,000원이면 하려고 했는데 500원? 우리는 놀라운 고액권의 세계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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