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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Feb 26. 2024

말 그대로 럭셔리호핑투어

남중국해 뱃전에서 나는 울었네

얼마 전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봤던 터라, '럭셔리호핑투어'란 단어에서 자꾸만 그런 뉘앙스가 떠올랐다. 럭셔리와 안 럭셔리, 끊임없는 분출과 삭임, 계급전복과 진짜 전복 같은 것. b의 설명에 따르면 '럭셔리호핑투어'에선 전복은 아니어도 해물라면과 망고, 코코넛커피스무디가 제공된다고 했다. 특히나 맥주는 무제한이라고. 거기에 다들 혹했는데 이어지는 설명엔 잠시 주저했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edm파티, 그것도 mz 어쩌고 하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우리도 mz의 선봉장이 될 수 있겠으나 그건 아무래도 머쓱한 일이었다. 그냥 쭈구리처럼 있다 오는 거 아냐? 되게 민망하고 어색하게 선 병풍처럼. 그러나 인원이 일곱이다. 펼치기만 해도 일곱 폭은 될 예정이니 우리는 투어신청을 한다. 하고야 만다.


모임 장소인 선착장에 이르러 제일 먼저 한 일은 썬크림 바르기였다. d가 사 온 대용량 썬크림을 척척 발라야했다. 날은 무섭도록 화창했다. 개코팀 여기로 모이세요, 우리는 줄을 지어 스피드보트에 오르며 개코일까, gecko일까 의미 없는 잡담을 했다. 스피트보트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끔 핸들을 돌릴 때면 선체가 기울어 바다에 닿을 듯했다. 잠시 스쳐가는 <슬픔의 삼각형>. 우리는 그때부터 신이 나 있었다. 한참 달리던 스피드보트가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진한 갈색의 외관, 그래서 마치 목선 같기도 한 배가 보였다. 배에는 앞선 타임의 투어팀이 타고 있었다. 피날레이자 우리를 환영하는 다이빙 시범이 이어졌다. 형광연두색 옷의 크루들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새로운 배에 오르니 투어진행자가 능숙한 솜씨로 자리를 배정했다. 배의 중앙엔 큰 주방이 있었고 그 앞으로 테이블들이 늘어선 형태였다. 우리에겐 가장 앞자리, 보통 때면 늘 면구스러운 얼굴로 피하곤 했을 그 자리가 주어졌다. 사실 스피드보트 때부터 살짝 눈치채고 있었다. 정작 mz는 신청 안 한 분위기라고. 참가팀의 연령은 우리보다 조금 높아 보였다. 가족끼리 온 이들, 커플끼리 온 이들, 그리고 아마 회사에서 단체로 온 것 같은 이들도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 '이사님'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들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어쭙잖은 진행자의 농담에도 굳게 굳은 얼굴들. 과하게 들썩이는 이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어도 여긴 바다 위다. 물론 우린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흥이 난 상태다.

테이블과 마주한 스피커에선 쩌렁쩌렁한 음악들이 울려퍼졌는데 이 역시 edm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철 지난 가요들. 어째 자꾸만 신명이 난다. 오리발을 신고 바다에 들락날락하는 사이에 커피가 배달되고 망고와 해물라면도 식탁 위에 오른다. 사운드는 폭격처럼 쏟아지고, 한낮에 맥주까지 걸친 우리는 급기야 덩실덩실 춤을 추고야 만다. 크루들은 쇠젓가락으로 맥주캔을 뚫는 묘기를 선보였는데, 잘 농축된 라거는 그때마다 펑펑 거품을 뿜었다. 맥주가 젖은 머리를 타고 흐른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것은 맥주인지 땀인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방방 뛰었다. 그때 정말이지 눈물이 찔끔 차올랐다. 20년 전 과방에서 구겨져 있던 코흘리개들이 어엿하게 자라 바다 위 맥주흘리개가 되었구나. 정말 잘 커주었어, 너희들.


그건 뭘까, 흩어진 감정들을 엮어 올려 크게 터뜨리는 과정. 달리는 고속버스 속 난장이나 굿판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 그런 게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만 느낀 것은 아닐 듯했다. b와 d는 의자까지 밟고 올라서 배의 대들보를 잡고 춤을 췄으니. 나는 입 찢어져라 웃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는데, 구석에 흘깃 나온 다른 테이블의 모습에 그만 숙연해졌다. 특히나 회사에서 온 그 테이블. 살짝 얼은 듯한 표정, 기계적인 박수. 그 사람들 시야에 가득 잡혔을 b와 d의 엉덩이. 흠, 거기까지만 하자.

이렇게 맥주를 뿌려대니 럭셔리였구만, 남은 라면을 후루룩 빨아올리고, 인생 망고다 하며 망고를 샅샅이 바른다. 그러다가도 용기 내어 다이빙을 하고, 숨 참고 바다 깊숙이 잠수도 해 본다. 오색의 물고기들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작은 섬에 이르러선 파라솔 아래 누워 해를 쬔다. 용감무쌍한 친구들은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떠나고, 남은 우리는 색색의 칵테일을 홀짝인다.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들었을까, 너울거리는 지붕 아래서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쌀국수 국물을 마시고 역시나 짜조와 모닝글로리를 격파하며 또다시 맥주를 마신다. 선상의 댄스타임 이야기는 해도 해도 마르지 않는다. 무수히 흘러간 노래들 중 어째 기억에 남는 건 '바나나차차'다. 일곱 중 애엄마는 넷, 그 넷의 어깨가 동시에 들썩인 순간은 또렷하게 남는다.

이번에 깨달았어. 신혼여행보다 재밌고 가족여행보다 보람차다. 친구여행이 최고다. 모두들 동의한다. 이다음에 또 언제 갈 수 있을까? 십 년은 너무 머니 오 년 후면 좋을까? 고개를 끄덕인다. 어젯밤 야시장을 돌고 돌며 만 동의 흥정을 위해 옆에 선 친구를 엮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어 어느새 비슷한 크록스와 색만 다른 반바지 차림을 하게 된 우리들. 아 맞다, 만 동이 오백 원이랬지. 오백 원 깎고 싶어서 빌기까지 했다니. 하다가도 d의 크록스는 개시도 하기 전 로고의 c와 r이 떨어져 나가 그만 옥스가 된다. 나머지 옥스도 문질러 떼내었건만 결국 한 짝은 크록스, 한 짝은 아무 로고 없는 짝짝이 신발이 된다. 그러니까 낮이건 밤이건 죄다 웃긴 일 투성이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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