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이탈리아 경찰과 애틋한 호스트의 마음
<아이 엠 러브> 다음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혹은 <비거 스플래쉬>. 어쩌다 보니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 세계를 떠돌게 된다. 이탈리아, 여름, 수영장. 엇갈린 사랑, 뜨거운 사랑, 떠나간 사랑. 그러니까 루카는 사랑에 미친 감독이네요. 밀라노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르다 호수로 향한다. 바다 아닌 호수건만 마치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 수평선 뒤로 산이 어른거리는 풍경은 아직까지 낯설다. 갈매기 대신 오리와 백조가 떠 있는 모습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호텔에 도착한다. 호텔이 되기 전엔 아마도 올리브 밭 아니었을까. 3층짜리 아담한 호텔은 깔끔하고 온화한 느낌이다. 리셉션엔 흰머리의 할머니가 있다. 체크인을 하며 모기 물린 곳에 바를 약을 빌렸다. 꼬마의 다리는 아직 울긋불긋하다. 긁어서 딱지가 앉은자리도 있다. 할머니의 안내로 우리가 묵을 방에 들어선다. 가로로 긴 수영장 너머론 먼 호수가 보인다. 언덕을 오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여행의 막바지 여정, 이곳에선 그저 쉬고 놀기만 할 작정이다. 사실 이미 계속 그래왔지만.
그래서 종일 수영만 한다. 다들 그러려고 온 모양이다. 독일 사람들은 매년 같은 곳, 같은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곤 한다는데 여기도 그러기에 적합한 곳처럼 보인다. 안내문이나 메뉴판에도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순으로 쓰여있다.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기에 몰래 훔쳐보았다. 직원이 가지고 온 것은 역시나 '아이스크림을 띄운 커피'였다. 독일식 맞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대척점에 선 달고 눅진한 커피. 그걸 마시기엔 날이 너무 덥다. 해 아래 서 있으면 머리가 익어버릴 것 같은 여름. 이 햇살에 행복해하는 것은 올리브 나무와 매미뿐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반가운 매미다. 독일에선 못 듣던 매미 소리.
파라솔 아래서 책을 읽다 더우면 수영장에 첨벙 뛰어든다. 배고프면 페로니와 파스타를 먹는다. 꼬마는 뽀모도로, 나는 아라비아따. 상냥하면서도 민첩한 직원에게 눈길이 간다. 주문부터 식사를 마칠 때까지 친절하고 세심하게 챙겨준다. 말 끝엔 항상 '마담'을 붙인다. 어딘가 익숙한 인상이라 느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보티첼리 그림 속 인물 같았다. 순하고 너그러운 눈빛. 그러나 능숙하고 신속한 응대. 그 한결같던 프로페셔널함이 살짝 흔들릴 때가 있었다. 조식에서 커피를 주문하며 컵 가득 얼음을 가져달라고 했을 때였다. 눈빛에 '갸웃'이 들어있어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곧 '알겠습니다, 마담'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챠오 벨라.
꼬마가 챠오 벨라를 말할 때면 시뇨라들 얼굴에서 웃음이 터졌다. 꼬마의 머릿속에선 여러 나라의 말이 굴러다닐 터였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 로잔에선 봉쥬르와 메르씨를, 제노바에선 본 조르노와 그라찌에를 배웠다. 낮에는 본 조르노고 저녁엔 보나 세라야. 처음엔 헷갈려하더니 열심히도 써먹는다. 인사할 때 하는 챠오 알지? 챠오는 원래 이탈리아 말이야. 하니까 반색하는 눈치다. 그리고 파스타도 이탈리아 거고, 피자도 이탈리아 거지! 외친다. 어느새 꼬마는 이탈리아 대신 이딸리아라고 말한다. 이딸리아 경찰은 폴리찌아야, 독일 경찰은 폴리짜이고. 그래, 엄마는 폴리찌아는 괜찮아도 폴리짜이는 안 만나고 싶구나. 게슈타포와 슈타지는 더더욱.
그러나 늦은 오후 시르미오네 마을로 향하는 길, 폴리찌아든 폴리짜이든 간절히 원하던 때가 있었다. 회전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 뒤차가 우리 차를 박았다. 상대는 이탈리안 커플. 우리의 의사소통은 주먹구구 길게 늘어진다. 구글 번역기가 답답함을 간신히 해소해 주나, 완전치는 못하다. 교통사고에 대한 시각이 너무 다르기에. 한국에서처럼 경찰이나 보험사를 부르자는 말에 이탈리아 총각이 말한다. 부상자가 없으면 경찰은 안 와요. 물론 경미한 접촉 사고이긴 하나 경찰이 아예 오질 않는다고? 보험사도 안 올 거예요. 내가 이 페이퍼를 써 줄 테니 가져가서 당신 보험회사에 청구해요. 하며 주섬주섬 뭘 꺼내 쓰기 시작한다. 자동차 번호와 사고 시각, 사고 경위 등을 기록하는 양식이다. 음, 일단 그 말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그냥 보험 없이 현금받고 갈래요? 하며 적은 액수를 제시하질 않나, 그걸 거부하니 써서 내민 페이퍼엔 자동차 번호가 틀려있질 않나.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그 와중에 사고 현장을 그림으로 묘사해 놓은 것에선 웃음이 난다. 공식적인 서류에 그런 칸이 존재하는 것도, 거기 그려놓은 자동차 그림도 너무 허술해서 귀여웠다. 긴장이 누그러져 꼬마와 나는 물티슈로 앞 유리창을 닦기까지 한다. 그러는 사이 해는 뉘엿뉘엿 지고. 다행히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상황이 종료된다. 사고 부위와 서로의 인적 사항을 사진으로 남기고, 수정된 페이퍼도 받는다. 마지막엔 결국 웃으며 챠오 하고 헤어진다. 아버지 병원에 가야 한다고 급하다는 건 역시 뻥이었군 하면서.
시르미오네는 가르다 호수를 둘러싼 마을 중 하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유물을 인양하던 그 호숫가. 건져낸 동상의 팔로 악수하며 화해를 청하던 엘리오를 생각하며 어둑어둑해진 호숫가를 걷는다. 슬그머니 뜬 조각달은 아름답고, 먼 곳의 불빛은 부드럽게 반짝인다. 허나 금강산도 식후경, 사고 여파로 조금 지친 우리는 배가 고프다. 마을 광장에서 몇 골목 안 쪽의 레스토랑을 찾는다. 오래된 성의 부속 건물처럼 보이는 레스토랑. 정원엔 포도나무가, 창가엔 호수가 가깝지만 우린 실링팬 아래에 자리 잡는다. 서버들의 흰 셔츠도 땀에 젖은 날씨기에. 기억에 남는 건 식사보다 디저트였다. 접시를 치울 무렵, 아저씨 한 분이 디저트 카트를 밀며 등장한다. 고색창연한 카트 위로 알록달록 반짝이는 디저트들이 가득하다.
눈을 떼지 못하는 꼬마에게 어떤 걸 먹고 싶니?라고 부드럽게 묻는다. 수박, 각종 베리, 치즈, 여러 가지 케이크와 푸딩들. 꼬마는 고심 끝에 딸기를 고른다. 자연스레 우리에게도 질문이 이어지고 어느새 우리의 식탁은 달콤한 이탈리안 돌체로 풍성해진다. 이거 여기서 직접 만든 거 같아, 나는 시럽이 흘러내리는 푸딩을 뜨며 말한다. 저 아저씨 솜씨가 상당한데? 순식간에 디저트 세 접시 팔았어. 7유로짜리 푸딩이라니, 나중에 계산서를 받고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으나 입 안에 남은 달콤함으로 겨우 진정한다. 맛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아까 큰 사고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픈 곳은 없으니 다행이다. 다행은 다행을 물고 이어진다.
체크아웃을 기다리며 호텔의 방명록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첫 페이지의 날짜는 2018년. 이어지던 글은 2020년에 멈춘다. 그리고 다음 글은 2022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가 다 안다. 텅 빈 수영장 위에 천막을 덮고, 모든 객실의 문을 잠그고, 그랜드 피아노 위엔 먼지만 뽀얗게 쌓였겠지. 올리브와 매미만 남았을 거야. 세심한 배려로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갑니다, 알아보는 이 드물겠지만 한글로 방명록을 쓴다. 지난날 많이 이들이 남겨줬던 북촌의 방명록이 떠오른다. 오고 가는 여행자의 마음과 기다리며 새 이불을 깔아 두는 마음도. 제법 고된데 재미있었지, 그래서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지. 나는 많고 많은 나 중에서 호스트였던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했었던 것 같다고 깨닫는다. 그 시절을 사랑했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