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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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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Sep 16. 2024

여름은 가고 우리는 성장했으니

알프스를 만만히 보지 마시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 분분한 햇살. 떠나올 때보다 한껏 그을린 얼굴을 하고 짐을 꾸린다. 이탈리아, 안녕. 언제 와도 좋은 곳. 지도를 보며 돌아갈 여정을 살펴본다.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를 거쳐 올라가느냐, 아니면 왔던 코스와 비슷하게 스위스를 지나 올라가느냐.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스위스를 거치기로 한다. 이번엔 로잔 대신 루체른을 찍고 가기로. 그런데 그건 크나큰 오판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길, 차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다들 휴가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인지. 알프스 산맥을 터널로 지나는데 아직 공사 중인 구간이다. 그래서 터널 내 혼잡을 막기 위해 신호등이 줄 지어있고, 차선도 좁디좁다. 꾸물꾸물 한 세월, 아침 10시 반에 출발해 저녁 7시 반에 루체른에 도착하고야 만다. 꼬마가 말하길 자신의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이 자랄 정도의 긴 시간이었다고 한다. 만 4세에겐 억겁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시골영감과 동화뮤지컬을 계속 들어야 했던 우리에게도.

그래서 루체른의 호숫가에서도 우리의 눈은 핑핑 돌고 다리는 힘 없이 팔랑인다. 어디 나갈 기력도 없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식사를 한다. 메뉴판에 등장한 슈니첼을 보며 다시금 북녘으로 진입한 것을 실감한다. 그간 늘 트렁크에 넣어 다니던 자전거도 꺼내본다. 루체른 호수를 따라 저녁 산책을 한다. 꼬마에겐 남아도는 체력을 소진할 기회가, 우리에겐 얼마 안 남은 근력을 끌어모을 시간이 필요했다.

호텔은 몇 백 년 전 지어졌다는 건물이었다. 건물 구조가 복잡한 것을 보니 조금씩 증축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방은 어엿한 구관. 낮은 천장엔 나무 대들보가 가로지르고, 구조도 조금 엉성하다. 이거 혹시 왕년의 마구간 아니었는지 몰라. 슬쩍 틀어본 이동식 에어컨이 당당한 소음을 뿜어냈지만 다행히 이탈리아보다 서늘한 밤이다. 에어컨 없이도 잘 잘 수 있었다. 구유 속의 아기처럼.

반전은 조식을 먹으러 간 식당이었다. 테이블보가 정갈하고, 생화장식은 아름답고 기품 있었다. 음식 종류는 몇 안 되지만, 나야 뭐 맨날 먹는 것만 먹으니. 역시나 (얼음을 넣은) 커피와 요거트, 빵과 버터, 약간의 과일과 샐러드로 마무리한다. 보통 때는 거르는 아침을 여행 때는 챙겨 먹게 된다. 아무래도 남이 차려줘서 그런 것일까.

어제 그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집까지 거리를 많이 줄였다. 스위스에서 독일로 국경을 넘자 말자 시원하게

쫙쫙 밟는다. 아우토반이 이리 그리웠을 줄이야. 표지판의 독일어가 새삼 반가웠다. 집이 가까워지는 만큼 자연스레 돌아가 할 일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거주증 수령, 독일운전면허증 수령, 다가오는 꼬마의 입학 준비. 아직 가방을 비롯한 각종 준비물을 하나도 사지 않은 상태. 휴가 기간 동안 머릿속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것들이 차례차례 줄을 선다. 데드라인의 놀라움이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묵은 공기가 반긴다. 창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킨다. 실내에 있던 식물들은 그런대로 무사했는데, 발코니에 내놓은 애들은 영 비실비실하다. 비라도 맞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뜨거운 공기에 힘들었나 보다. 소중한 깻잎과 바질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비슷하게 심었던 부추는 살아남았다. 레몬과 올리브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되려 이 더위를 즐기는 듯도 보였다.


셋이 같이 하는 여행, 이러쿵저러쿵 어떻게든 굴러간다.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최장 9시간의 이동도 어떻게든 이겨내 가며 돌아왔다. 알프스를 두 번 넘었고, 하나의 바다와 세 개의 호수를 지났다. 몰랐던 우리의 능력-유난히도 구린 휴게소를 찾는-도 알게 되고, 꼬마의 노래 솜씨-돌아올 때는 시골영감 3절까지 마스터했다-도 늘어서 왔다. 무엇보다 이제 셋이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이 무섭다고 등에 매달린 꼬마가 목젖 암바 걸 일도 줄어들었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하나뿐인 소중한 목젖인데.


다음은 또 언제 어떤 여행이 될까. 들로 산으로 바다로, 또다시 달력을 들춰본다. 나중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그냥 지금의 이 나른한 피곤과, 검게 탄 얼굴들만 기억하자. 묵은 빨래와 떠난 식물들은 잊고. 자는 꼬마의 머리를 쓸며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마리카락이 조금 긴 것도 같다. 역시 여행은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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