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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rey Sep 24. 2022

소울 푸드

음식과 기억에 관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0. 고백


세상에 먹는 것만큼 즉각적이고 풍부한 기쁨이 어디 있을까? 나는 좋은 음식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유익함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육신에는 연료를 공급하고, 정신에 풍요의 감각을 채워 넣는 일이다. 따라서 음식을 찾는다는 건 단순히 배를 채우는데 그치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고 돌보는 일과 깊게 관련 있기도 하다.  


지나온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특정한 음식과 그에 관한 기억은 내 인생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특정한 감정이나 이벤트 속에서 어떤 상징이 되는 음식들이 있고, 그 음식들이 의미를 갖게 된 이후로 내 삶은 어느 쪽으로든 발전하거나 심화되어 왔다.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분명 그런 식으로 의미가 구분된 특별한 음식과 꼬리표가 있을 거다. 잘 짚어보면, 우리에게는 그런 음식이 이미 많다.


김치도 모두 같은 김치가 아니고, 할머니의 김치. 가족과 함께 담근 김장김치, 실망스러운 맛의 싸구려 김치, 플라스틱 통에 담긴 채 내 자취방에 들어온-받은 김치, 최초로 마트에서 사 먹기 시작한 김치, 엄마나 할머니의 도움 없이 스스로 담근 김치 같은 식으로 일일이 구분할 수 있듯이. 그리고 각각의 김치에는 붙인 이름에 맞는 기억과 감정이 있다. 우리가 그 김치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의 기억을 허락했기 때문에 이름 붙은 김치와 다른 김치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기억을 담은 음식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름 비슷한 것을 붙이고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특별해진다. 그런 음식은 추억의 상징이 되어 우리를 이끈다.


음식이 의미 붙인 기억의 상징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그런 식이다. 추억을 꺼내 소화하고 싶을 때, 나는 대신 어울리는 먹을 것을 생각해내고, 대체품이라도 찾고, 만지고, 만들고, 씹어 삼킨다.   


내게도 이름 붙인 김치보다도 훨씬 많은 음식의 분류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내 마음의 주방에 그 음식들을 하나하나 이름 붙여 보관해왔다.


그러니 내 모든 기쁨과 슬픔의 기억 속에는 언제나 그에 맞는 음식이 있었던 셈이다. 나는 즐겁거나 슬플 때 그걸 기념하거나 위로하기 위해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찾았다.


때때로 음식은 일종의 의례적 부산물이었고, 생활의 상승이나 하강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좋은 시절에는 전골이나 모둠 요리를 먹던 가족의 식탁은 우리 처지가 열악해지면서 간소하게 변해갔던 시기가 있다. 그때는 삶도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게 변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질 때 음식이 그걸 반영했다. 그럼에도 음식은 결코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는 법이 없었고, 지금도 충실하게 내가 삶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도록 곁을 내주며 옆자리에 있다. 나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음식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쓴다.  



음식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시절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나의 개인적인 역사를 떠올릴 때마다 음식이 매개가 된다. 음식은 내게 고향보다도 뚜렷한 향수의 대상이고, 지치고 불안할 때 나를 다독이고 배를 채워준 헌신적인 친구이자 결핍을 품은 내 기쁨과 슬픔의 항아리이다.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 덕분에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깨우칠 수 있었고, 요리하는 법을 익히고 알아서 배를 채우는 방법을 깨우쳐가면서 현재를 위로하고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다.


구현할 수 있는 레시피가 늘어날수록 점차 내가 쓸모 있고 그럭저럭 독립적이라고, 살아남을 줄 아는 최소한의 기질 정도는 갖춘 사람이라고 위안했다. 내가 버너에 불을 지피고 냄비를 올린 최초의 기억은 7살 때의 것인데, 아주 어렸을 때 그 느낌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음식을 해 먹는 것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눈을 감고 기억을 되짚으면 그 집을 다시 그려낼 수 있다. 오래되어 빛바랜 기억을 더듬을 때는 집중해야 한다. 천천히. 작은 것부터 떠올려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이 생긴다. 이 기억은 늘 마당에서 시작한다. 문지방을 넘으면 거실 겸 복도가 있고, 우측으로 TV와 길쭉한 다인상, 책장이 보인다. 직선으로 몇 걸음 지나가면 주방 문간이 있다. 주방은 길쭉하고 넓은 공간이다. 안쪽에는 팔 한쪽 너비 정도 되는 창이 있는데, 열면 회색 시멘트 돌로 쌓은 담벼락이 보인다. 타일이 깔린 바닥 위에 어린아이 키 정도 되는 파란색 플라스틱 쌀통이 있다. 어렸을 때, 내가 생쥐처럼 저 쌀통 안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고 상상했던 바로 그 쌀통이다. 한쪽 벽에는 가스레인지가 있고, 우리 가족과 10여 명의 ‘하숙생’들의 식사를 너끈히 준비할 수 있을 만큼의 식기가 보관된 수납장이 있다.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풍요의 그림자 뒤로 짙은 어둠이 깔려있던 시기이기도 하고. 어쨌든 순진함을 허락받은 유일한 시기였으니 내가 호시절로 기억하는 걸 테다.


다시 그 집을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에겐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그 집을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기억을 짚어 냄새와 장면, 물건 하나하나를 가능한 떠올려내서 어떻게든 그 집에 다시 들어가는 방법뿐이다.   


내가 7살일 때 일이다. 엄마는 집에서 낮잠을 자고 계셨고 나는 얌전히 책을 읽으며 밥때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지극히 보통의 오후였다. 평소라면 누가 밥을 챙겨 주었겠지만 그날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밖에 나가 있었다. 배가 고파 참다못해 엄마를 깨우러 갔는데, 엄마는 피곤해서 일어나지 못했다. 내 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어린아이에게는 한나절 같았던 몇 시간이 지났고, 나는 배가 몹시 고팠다. 엄마를 또다시 깨우려 시도하는 건 아마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잘못하면 이번엔 윽박을 지를지도 몰랐다. 나는 먹을 게 없을까, 하고 주방에 내려갔다. 짜고 마른반찬 몇 종류가 플라스틱 반찬통에 들어있었지만 그걸 먹고 싶지는 않았다.


갓 만든 것, 나를 위한 것, 뭔가 따뜻한 걸 먹고 싶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창고 방에는 먹을 게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면 가끔 온갖 물건들을 창고방에 어지럽게 늘어놓곤 했는데, 언젠가 거기서 인스턴트 라면을 봤던 기억이 났다. 나는 창고방의 미닫이 문을 열였다. 늦은 오후의 허연 빛이 드리운 창고방에서 사리곰탕 봉지를 찾아 그걸 끓여 먹을 생각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때의 나는 한글을 잘 읽는 어린이였고, 봉지 뒷면에 쓰인 조리방법을 뚫어져라 읽고 ‘ml’가 무슨 뜻인지 몰라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4컵’이 물을 담아 먹는 용기를 네 번쯤 채울 양이라는 것은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불 앞에 서 본 적이 없었고 가스를 켜 보지도 않았지만 라면을 먹어야겠다는 아주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7살의 내가 불 앞에 섰다. 밸브를 누른 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몰라 죽어라 힘을 주고 밸브를 돌리려 애썼다. 한참 씨름한 끝에 눌러서 돌려야 밸브가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이 아플 정도로 시도한 끝에 알아낸 교훈이었다. 밸브를 열고, 버너 손잡이를 세게 틱, 틱 돌리자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게 불꽃이 켜졌다. 눈앞에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 뭔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자립 비슷한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처음 배운 순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아주 간단했다. 냄비에 물을 네 컵 부었고, 물이 바르르 끓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기했다. 펄펄 끓는 냄비에서 뜨거운 김이 나오자 손이 델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호기심과 성취감이 주는 기쁨이 더욱 컸다. 딱딱한 건면을 냄비 안에 넣고 희멀건 분말수프를 넣자 금방 면이 풀어지며 뽀얀 액체에서 거품이 일었다. 구수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완성된 라면을 사기에 담고 쟁반에 올려, 계단으로 향했다. 쟁반은 무거웠고, 나는 국물이 흘러넘칠까 봐 조심하며 2층까지 들고 올라갔다. 그러고선 자고 있던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 엄마. 내가 라면을 만들었다. 이거 봐.


고작 라면 갖고 이렇게 많이 말한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꼭 라면이라서 중요하다거나 혹은 중요치 않다는 게 아니다. 자립의 방법을 시도한 최초의 기억이 라면에 담겨있기 때문에 의미있는 음식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는 ‘음식에 기억을 담는 순간’의 탄생이다.


살다 보면 평생 머릿속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문득 그 순간을 통과하고 있을 때 이것이 내게 중요한 기억이 되리란 걸 직감한 때가 있지 않은가? 스칠 때는 어떤 느낌에 불과하지만 지나와서 평생에 걸쳐 삶에 남을 강렬한 이미지로 자리잡는, 앞으로 내 기억의 정렬에서 머릿돌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시작점 같은 작은 사건말이다.


이것도 그런 종류의 순간이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7살 배기 아이는 직접 끓인 라면을 행복하게 먹었고, 내 성격의 어떤 계열은 바로 그 순간 결정된 것일지 모른다. 배가 고프면 직접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해결책. 그리고 따뜻한 음식이 주는 안도감과 기쁨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 감각도 국물처럼 후후 불고 삼켰다.


라면과 자각이 뱃속에서 같이 소화되고 있었다. 자라면서 보고 만났던 어른들처럼 나도 앞으로 수없이, 스스로 불을 다루게 될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소울 푸드>를 말하는, 음식에 개인적 역사를 부여하여 라벨링하려는 욕구를 만든다.


적어도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위장을 채울만한 그럭저럭 좋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사람이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이 순간으로.




'소울푸드'soul food는 본래 노예제 시대, 미국 남부지방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많이 먹던 음식, 혹은 그 영향으로 발전한 남부 음식을 지칭합니다. 현대 한국과 일본에서 이 표현은 '영혼을 울리는 음식', '추억의 음식' 정도의 의미로 변형되어 널리 쓰이지요. 저는 두 번째 의미를 대체할 그만한 단어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 표현을 쓰기로 마음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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