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사회가 쥐여주고, 한창 자랄 때까지 달고 있으면 곁눈질 받고, 다 큰 뒤에 찾아오려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는 인형이고, 또 하나는 핑크다.
우리가 아이였을 적에도 핑크가 이렇게 튀는 색이었던가?
한때, 여자애가 자라는 곳이라면 핑크는 어디에나 있었다. 여러분의 어린시절에서 핑크의 지분을 찾아보자! 문구점에서 핑크색 학용품을 무의식적으로 고르던 기억, 누가 양갈래로 매준 머리끈의 색깔, 분홍분홍한 옷이나 신발을 매치한 어린이의 뒷모습. 누군가 입혀준 핑크색 옷을 입고 사랑스러움을 뽐내던 사진…. 귓가에 호들갑 떠는 목소리도 다시 들리는 거 같다. “어머! 핑크 공주님이네!”
(그러게, ‘핑크 공주님’ 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한 말일까? 핑크를 좋아하면 공주님이 되는 걸까?)
많은 여자애들이 자라며 핑크와 멀어지는 경험을 한다. 자연히 기본템처럼 공급되던 핑크의 지위도 떨어진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어릴 때는 옷이며 물건이며 기본 옵션이 온통 분홍색이더니, 언젠가부터 분홍이 모두를 위한 색이 아니게 됐다. 소녀가 된 여자아이는 내가 여전히 핑크를 고를 만큼 여성스러운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다. 핑크 앞에 위축되거나 반감을 품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아이를 향한 세상의 시선과 평가가 누적될수록, 아이에게 자기가 정말 사랑스러운지 의심하는 마음이 싹튼다. 어떤 여자애들은 이 과정에서 영영 핑크랑 서먹해진다. (그리고 검정색과 절친해진다…?)
핑크를 보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밝다. 행복하다. 사랑스럽다. 철없다. 즐겁다. 소중하다. 사랑에 빠지도록 손짓하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핑크에는 여러 쉐이드가 있는데도 위의 ‘핑크이미지’들이 너무나 강력해서 핑크에 손을 뻗으려면 위의 이미지가 나와 일치해야 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렇게 핑크를 부담스러워 하는 인식은 늘어간다. 의지와 무관하게 사람 위에 (상냥함+30, 명랑함 +50, 공격성 -20) 필터가 얹히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달까….
그런가하면 핑크는 낙인이 되기도 한다. 옅은 핑크색은 새끼 돼지의 가죽 색과 비슷해서, 체구가 큰 사람이 핑크를 걸칠 때 누구의 심술궂은 마음은 공주 대신 돼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남자애가 분홍색을 좋아하면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뜬다. 또 밝고 진한 색채의 핑크는 눈에 띄어서, 핑크를 입으면 더 많은 시선을 받을 수도 있다. 부작용으로 날씬하지도, 예쁘지도, 화려하지 않은 사람이 핑크를 걸치면 비웃는 풍조도 남아있다. 또, 다 큰 성인이 핑크색 아이템을 많이 갖고 있으면 은근히 ‘소녀감성’이란 말을 듣기도 하고. 자립심이 생기기 시작한 아이는 핑크를 보고 ‘으! 공주병같아!’ 하고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가만보면 핑크만큼 격하게 미움 받는 색도 없는 거 같다.
여성성을 산업화한 핑크의 활용은 이런 식이다. 화장실 앞 핑크계열 인포그래픽이 붙어있으면 여자화장실이려니 한다. 매월 새로운 핑크 계열의 색조화장품이 볼과 입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개발된다. 핑크색 리본은 유방암 인식향상 캠페인에 동원된다. 임산부 뱃지도 분홍색이다. 병원에서 공격성을 감소시키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간호사 유니폼으로 채택하던 색깔이기도 하다. 완구제작회사,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는 여자아이나 공주 역할에게 1차로 핑크색을 준다. 여자가 여럿이면, 더 예쁘고 빛나는 배역에게 핑크 우선권을 배치한다. 이렇게 핑크는 쉽게 ‘여성스러운 색’으로 통용된다.
사실 핑크가 상징하는 ‘여성성’의 기호적 특성은 산업사회에서 강화된 결과물이다. 그 전에 천연 핑크는 안료로 쓰기에도 귀한 색이었다. 당연히 남성도 붉은색, 핑크색을 취하는데 어색함이 없었고 색의 선택권은 성별이 아닌 계급에 의해 정해졌다.
그럼, 핑크가 진지하지 않은 취급을 받게 된 것도
세상이 여자애들에게 핑크를 배급해주면서 시작된 일은 아닐까?
<바비>가 북미에서 메가히트를 치면서 관람객들이 핑크 의상을 입고 영화를 즐기는 작은 문화가 확산됐다. 나도 고대하던 <바비>를 보기 전에 옷장을 열었다. 핑크색 옷은 없었다!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옷을 그렇게 많이 소비했는데 어떻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순간 엄마가 골라준 핑크색 옷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던 기억, 수많은 옷가게에서 핑크색 옷을 대보자마자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기억이 스쳐갔다. 나를 핑크로부터 고립시킬 필요는 없다. 핑크는 잘못이 없는데, 내 마음이 단단하게 준비되지 않아서 애써 핑크에 붙는 긍정적인 이미지마저 내 것이 아니라고 신포도처럼 대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를 걸친 사람이 연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상상한다. 즐겁고 밝은 모습을 두르는 것, 평화로운 마음을 비치는 것, 애정을 드러내는 건 곧 약해지는 걸까? 나쁜 걸까? 그렇지 않은 거 같다. 핑크는 프라이드와 가까운 색깔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진 마음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세상과 사람을 애정하는 마음의 온도와도 닮았다. 모두가 사랑을 입고 사랑을 누릴 자격이 있으니,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핑크를 완전히 미워하기도 아까운 일이다. 모든 색이 그렇듯 핑크만이 지닌 기쁨이 있다. 그걸 거부하지 않아도 된다!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에 핑크색 티셔츠를 하나 샀다.
이 티셔츠를 볼 때마다 이상한 바비의 다리 찢기가 생각나서 두고두고 즐거울 거 같다.
우리가 내키면 맘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핑크를 다시 뺏어오자.
핑크를 좋아하려면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정답은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