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을 대하는 이상하고 완벽한 습관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피부가 바싹 마르는 쌀쌀한 계절이 되면 참을 수 없이 초콜릿이 고파집니다. (왠지 아저씨들이 소주&국밥을 찾는 심리와 비슷하게 기능하고 있지 않나 의심 중) 저는 초콜릿을 생각하면 곧바로 이런 이미지가 연상돼요. 우유, 설탕, 담요, 겨울, 노란 전구색 조명, 애정, 어린이, 혼자인 사람, 금색과 은색의 바스락거리는 알루미늄 포장재, 영문으로 작성된 볼드한 단색 필기체, 손가락…. 모든 음식에는 정서의 온도가 있고, 저의 매우 주관적인 분류법에 따르면 초콜릿은 따뜻한 음식인데요. 그러고 보니 올해 <웡카>가 개봉한다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엉망인 영화일지 기대가 됩니다. 사실 저는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그토록 사랑받은 이유도 다른 어떤 디저트보다 ‘초콜릿’을 전면에 배치해서 그런 건 아닐까... 남몰래 생각의 사족을 달고 있는데요. (사실 그 공장은 20세기말에 이미 온갖 실험적인 식품류를 생산한 다국적기업의 핵심 시설이고 그건 별로 따뜻한 사실이 아니니까요…) 만약 제목이 <찰리와 사탕공장>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쨌든, 초콜릿에 집착하는 마음과 습관에 대해서 고백하는 짧은 글을 적었습니다.
J와 초콜릿
J는 식사 후에 항상 단 음식을 먹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해야 하고 개를 키우면 매일 산책을 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듯 식사를 하고 나면 습관처럼 달콤한 음식을 찾는다. 모계로 2대째(어쩌면 3대째) 당뇨 병력이 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사계절 내내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거대한 청설모처럼 집 여기저기에 달고 새콤하고 기름진 음식을 저장해 두었다. 냉장 칸에는 직접 만든 케이크, 청포도, 저온살균 우유 같은 것들, 냉동고엔 아이스크림과 얼린 킷캣, 가장 좋은 시식 시간을 놓쳐 남아버린 쿠키, 마들렌 같은 게 쑤셔 박혀 있다.
그중에서도 J가 가장 자주 찾는 건, 초콜릿이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5종의 초콜릿이 있다. 우유, 탈지분유, 캐러멜, 소금, 비스킷, 꿀, 아몬드 같은 재료가 들어간 짙은 당분 조각은 J에게 즉각적으로 풍요와 행복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건 어린이들이 막연하게 품는 오래되고 강력한 기대를 닮았다. (“초콜릿!”) 초콜릿에 빠지는 날에는 경험한 적 없는 강력한 가짜 향수가 존재감을 행사해서 몰래 조금 벅찬 마음까지 든다.
J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초콜릿은 두께감 있는 네모 납작한 틀로 정형된 판초콜릿이다. 한 조각씩 뚝뚝 잘라먹을 수 있도록 깊게 선이 들어간 형태여야한다. 포장지는 단순한 색상을 쓰고, 인쇄된 상표는 두껍고 진한 글씨로 표기되어 있을 때 눈이 가장 즐겁다. 제일 선호하는 건 너무 달지 않은 밀크초콜릿이지만, 다크 초콜릿도 자주 먹는다. 초콜릿의 크기는 손바닥만큼 넓은 것이 좋다. 종이 포장지를 뜯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은색 포장지가 나올 것이고, 끄트머리부터 수평으로 살살 뜯으면 고동색 크레용처럼 그윽한 색과 빛깔을 내는 초콜릿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즐거운 시간이다. J의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초콜릿이 부러진다. 매끈하고 반짝반짝한 초콜릿 조각은 자꾸만 쪼개고 싶게 생겼고, 혀 안쪽에서 부서지는 매 조각이 죄악처럼 달콤하다.
세상엔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는 사람도 있지만 J는 초콜릿을 깨물어 먹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것도 차갑게 만들어서 부러뜨리면 딱 소리가 날 정도의 서늘한 초콜릿을 깨무는 걸 이상적인 시식 방법이라고 여긴다. 냉기를 머금은 초콜릿은 딱딱하지만 체온을 동원하면 금세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반들반들한 표면에 천천히 치아를 찍어내듯 누른다. 입술의 열감으로 겉은 아주 살짝 물러지고 속은 아직 단단한 상태다. 힘을 주어 깨물면 초콜릿이 똑. 하고 동강 난다. 입안에 들어온 쌉싸래한 초콜릿을 오독오독 깨물어 작은 조각으로 만든다. 밀도 높은 카카오향과 설탕의 맛이 혀 안에서 풀어지고, 초콜릿이 녹아들면서 아주 얇은 크레용 막처럼 입안에 코팅이 된다. 혀끝에 있는 돌기에도 초콜릿이 내려앉는다.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다시 초콜릿을 쪼갠다. 두 번째 조각도 같은 방법으로 먹는다. 세 번째, 네 번째 조각도. 어떤 때에는 팝콘을 씹는 템포처럼 성급하게, 어떤 때에는 단단한 사탕을 깨물어먹듯 신중하게 턱을 움직인다. 어쨌든 깨물어 먹는 방식을 선호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J는 어쩐지 자기가 위로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그리고 이걸 입에 넣고, 깨물고, 부수고, 녹이고, 위장에 넣어버려서 자기 자신을 달래주자고 위안 삼는다.
초콜릿 조각을 오독오독 깨물며 J는 생각한다. 초콜릿을 먹는 진짜 방식을 들키고 싶지 않다고. 물론 J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걸 얼추 안다. 아무도 그걸 문제 삼은 적도, 그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한 적도 없다. 사실 J는 혼자 있을 때 초콜릿을 먹는 걸 더 좋아한다. 아마 통제력이 J를 막지 않았다면 그는 아주 오래, 앉은자리에서 질릴 때까지 초콜릿을 깨물어 먹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