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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제 May 12. 2024

드리퍼가 없다면 어떡하지

[coffee story] 시리즈 1편

여행 갈 때 항상 챙기는 것이 있다. 책과 기타 그리고 드립 커피를 내릴 용품들. 


이 친구들은 여행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짬이 있던 없던 책은 어느 순간 찾게 되기에 챙기는 편이다. 기타의 경우는 평온을 위해서다. 요즘에는 여행 가서 기타를 자주 치지는 않지만 가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라는 불안감에 치지 않아도 챙기고 다닌다)


최근 여행 또는 지방 공연을 갈 때 드립 용품을 항상 챙긴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짐을 챙기고 가는 여행은 최소 2박 이상의 장거리 여행이다. 그렇기에 출발 전에 드립커피를 한 잔을 내리고 나가는데 그때 사용한 드리퍼를 챙기지 못한 채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3년 전쯤 현재 몸담고 있는 전유동밴드에서 대구의 공연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출발 이틀 전 좋은 커피를 볶고 드립 용품을 바리바리 챙겼다. 그때도 나가기 전에 드립커피를 내리고 사용한 드리퍼를 싱크에 방치한 채 드리퍼를 챙기지 않고 출발을 했다. 도착해서 짐을 풀며 그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드리퍼를 팔 만한 곳을 찾았다. 그나마 가까운 다이소는 오픈까지 3시간이나 남았고 바로 앞에 있는 대형마트는 때마침 휴무일이었다. 

그러다 비슷한 형태의 드리퍼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깔때기가 생각이 났다.

카페에서 사용 중인 이케아 깔때기


묵었던 숙소에는 간단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이 있어서 당장 뛰어 내려가 주방을 샅샅이 뒤졌다. 10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깔때기를 찾지 못했다.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다.

작년 여름 또다시 함께한 전국투어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드립용품 채비를 따로 하였다. 카페에서 쓰던 소지에 용이한 드리퍼를 챙기고 심지어 드립용 전기포트까지 챙겼다.

도착하자마자 커피를 먹으려 가방을 열고 세팅을 다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필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뿔싸, 이번에는 필터를 잊은 것이었다. 


바보 같음에 한탄을 하며 필터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다니다 어메니티로 준비되어 있는 목욕 타월을 발견하였다. 타월을 깨끗이 씻은 후 드리퍼에 안착시키고 커피를 내려 먹었다. 융드립 같은 깔끔함은 있었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맛으로 기억한다. 다음날에는 키친타월을 찾아서 키친타월로 워싱을 많이 한 후 내려 먹기도 하였다. 드리퍼가 없는 것보단 괜찮다만, 바보스러움에 너무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난처한 일이 발생한다면 또 일어날 수 있음을 가정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편이다.

필터는 생각보다 이곳저곳에 많이 팔고 키친타월과 같이 대체할 만한 대안이 있어, 필터 없어도 어떻게든 커피를 내려 먹을 수 있는 데에 반해 드리퍼의 경우에는 도무지 방도가 없다. 그나마 깔때기가 유의미한 결과를 내줄 것 같았다. (물론 작년에 한 다른 여행에서도 드리퍼를 챙기지 못해 임시로 짜파게티 범벅 컵을 개조하여 커피를 내려먹었다)

짜파게티 범벅 드리퍼


그렇다면 드리퍼로 내린 커피와 깔때기로 내린 커피의 차이는 어떨까?

하리오 v60과 이케아 깔때기를 사용하여 코스타리카 볼칸 아술 내추럴을 내려보았다.

생두 유통사에서 제공하는 커핑 노트는 다음과 같다.

노트 - 건포도, 블랙베리, 레드와인, 초콜릿


추출 과정은 다음과 같다.

40g의 물을 붓고(뜸) 30초 후에 60g, 30초 후에 60g, 30초 후에 60g 총 220g의 물을 붓고 드리퍼 안에 물이 원두를 다 통과하기 전에 드리퍼(또는 깔때기)를 제거한다. 이후 70g의 물을 첨수 한다.


시음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리오

향 - 말린 과일(반건조 느낌), 초컬릿, 캐러멜, 어두운 과실, 식고 나서는 약간의 황도

맛 - 건과일, 적절한 단 맛, 과하지 않은 산미, 와이니


깔때기

향 - 초컬릿, 과실향

맛 - 상대적으로 적은 단 맛과 부족한 바디감, 적진 않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산미, 다만 질감은 더 부드러움. 꽤나 실키함.

향의 극대화를 위해 꼬냑잔에 서브해 시음하였다.


하리오로 내린 커피가 향미가 더 확실하였다. 그에 반해 깔때기로 내린 커피는 질감이 살아있지만 맛이 뭉뚱그려져 있어 명확한 노트를 찾기는 애매함이 있었다. 다만 그 '뭉뚱그려짐' 덕분에 부드러운 과실음료를 먹는 기분도 났다. 방향이 다를 뿐 깔때기를 사용한 커피도 나름의 훌륭함이 있었다.


추출에서는 어땠을까.

아래 사진과 같이 하리오의 경우에는 전용 필터가 드리퍼에 알맞게 맞았지만 깔때기의 경우 필터가 안착되지 않고 뜨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원뿔의 각이 달라 발생한 부분이고 그 때문에 추출도 불안정하였고 하리오와 같이 물길을 만들어주는 리브가 없었기에 추출도 느렸다.


하리오에 비해 추출이 느려 과추출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쓸어내림의 현상보단 침출효과가 일어나면서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특징이 도드라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특징은 원투퍼 레시피나 특히 하리오 스위치 등의 침출을 유도하는 방식에서 도드라지는 형식과 유사한 결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었다.

굳이 여기서 반복 테스트를 해보지는 않을 것이지만 꽤나 유의미한 결과였다.


좌 - 하리오 V60 / 우 - 이케아 깔때기




이러한 커피를 마실 땐 로스터로써, 바리스타로써의 음료를 판단하는 기준서와 저울을 잠시 내려놓고 소비자로서 판단하게 된다. 이 두 커피 모두 관점에 따라 각자 훌륭한 커피였다.


다음 편에는 커피 필터와 키친타올을 사용한 맛 비교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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