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나는 책을 볼 때 제목부터 표지, 목차도 모자라 추천사나 작가의 말까지 눈여겨보는 편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일수록 더 그렇다. 물론 편집과 출판 과정에 작가의 뜻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본다. 이런 것들이 그 안에 담긴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하나의 Context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작가라면 내 의도에 반하여 그냥 출판사나 담당자가 알아서 하도록 놔두진 않았을 거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겉표지부터 작가의 말까지, 작품이 주는 메시지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 한강 다리를 건너는 열차 속
작품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모두 이 열차 안에, (모두 같은 칸은 아니겠지만) 타고 있는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작품집의 인물들은 각기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처한 상황도 다르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 쓸쓸하고 어설플까. 행동이 어설프다는 건 아니다. 권여선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이 되기에 어설픈 느낌이다. 특별한 사건 사고를 동반하지도 않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다. 그들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의 모습을 닮았다. 주인공이 되기에 어설픈 사람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거나, 어느 정도 선에서 장면 밖으로 밀려날 사람들. 이들은 흔히 누구나 한 번쯤은 맞게 되는 운이라든가 드라마 같은 일들, 결국에는 모든 게 잘 풀려서 행복하게 지냈다는 그런 상상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불쌍해 보인다거나 하는 동정심은 아니다. 그냥 이런 평범하고 흔한 인물들이 왜 어디 있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하는 것이다.
이런 감상은 곧 내가 얼마나 그동안 진짜 사람들을 덜 만나왔는지는 생각하게 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로 대부분 내가 만나는 인물들은 영화, 드라마나 SNS 속 인물들 뿐이다. 작위적이고 꾸며진 인물들. 이는 비단 미디어뿐만이 아니라 내 삶 속 사정도 마찬가지다. 나이는 하나 둘 쌓이고, 모두 적당한 대학을 나와 적당한 직장을 다니며 적당한 사람을 만나 적당한 이야기만을 공유할 뿐이다. 어디에도 숨겨진 진짜 이야기나 후일담을 들을 일이 없다. 그저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고, 각색되고 편집된 이야기들 뿐이다. 그런 인물들 뿐이다. 그래서 나는 권여선이 담아내는 진짜 인물들의 속 사정과 생각들을 통해 진짜 사람을 만나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는 실제가 아닌 일을 꾸며내는 일을 하지만, 그가 아니면 나오 같은 사람은 도통 실제를 볼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2. 불명확한 편집점
인물들 뿐만이 아니다. 권여선이 비추는 작품의 장면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데서 시작해서 이상한 데서 끝이 난다. 이런 특징이 유난히 이 작품집에서 강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안녕 주정뱅이'는 대부분 명확한 사건의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을 제외하고) 그래서 플롯을 따라가기 쉽고 작품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쯤 터지는 카타르시스가 누구보다 큰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집에서 그런 작품은 거의 없다. 인물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다.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어느 하나 명확히 답변해 주지 않고 소설은 공백을 보인다. 명덕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그래서 다영과는 그 뒤로 어떻게 지내는 걸까.(모르는 영역) 소희는 내가 책을 덮은 뒤에도 출근을 계속 잘하고 있을까(손톱). 데런은 고통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희박한 마음). 민수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해옥을 미워하진 않았을까(친구). 혁은 어머니를 만나러 갔을까, 형들과 누나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을까(송추의 가을). '그'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재), 그래서 결국에 작가가 이 이야기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중 하나는 바로 이 불명확한 편집점 그 자체에 있다. 명확한 기승전결의 글을 누구보다 잘 쓰는 작가는 편집점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져가고자 했다. 나는 이런 지점들을 좋아한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들에 기꺼이 시간을 내주고 싶다. 왜 그럴까. 왜 나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걸까. 어쩌면 수많은 기승전결들이나 명확한 캐릭터들이 주는 피로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그걸 억지로 명확한 구조로 재편집하고, 극대화하는 이 인위적인 시도들이 일종의 감정의 몰아붙임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실은 이렇게 이유 없는 연계와 뜬금없는 연결로 많이 이어져있다. 잘 알지 못하는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서 현재의 스냅숏만을 그저 보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과거나 미래는 그것을 보고자 하는 방식으로 각색되고 편집될 것이므로. 카메라의 아웃포커스 기능이 실제 우리 눈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닮아 편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 의도적인 편집점과 제한된 정보들은 이야기들을 더욱 현실의 고민들처럼 느끼게 했는지 모른다. 김애란 작가가 지적한 '정확함이 주는 위로'란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3. 아직 멀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
등장인물들은 모두 '아직 멀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 지점이, 딱히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이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에는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게 했다. 마음에 드는 것보다 들지 않는 것을 찾는 게 빠른 사람들, 본인과 상관없이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복보다는 좌절과 낙심의 감정을 떠올리는 사람들, 삶을 누리기보다는 이겨내고 버텨내야 하는 무엇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들을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계속 살게 만드는 건, '아직 멀었다'는 누군가의 책임 없는 희망 고문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해야 이 고통이 끝날지 모르지만, 이 시간들을 견뎌내더라도 좋은 날이 오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아직 내려놓고 포기하기는 이르다는, 그런 마음들만이 모두의 마음 깊이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비단 작품 속 인물들만은 아닐 거다. 현실의 나도 결코 이 고문 같은 늪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차피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가는 생물체의 운명 속에 유일한 진실은,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소희가 살아낸 하루가, 데런이 이겨내려는 하루가, 해옥의 땀나는 하루가 결코 나의 저무는 하루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때, 나도 모르게 책 제목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는 말을 모두 믿고 있을 그런 사람들. 나도 영락없이 그중 하나이기에, 내가 권여선의 인물들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