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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Jul 10. 2022

악(惡)을 따라서

[종의 기원 - 장유정]

나는 범죄 스릴러 영화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다큐를 보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잔혹한 고어물이나 공포적인 무드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두 가지 정도 이유였는데, 먼저 나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두뇌 싸움 자체가 흥미로웠다. 검경을 비롯한 수사 조직과  규범과 체계, 그리고 이를 피해 도망치는 범죄자, 나아가 법정에서 법리를 다툴 때 날카롭게 부딪히는  규정의 흠결, 논리의 틈새가 흥미로웠다. 법을 전공했지만 현장에 가볼 일이 없게 된 사람으로 법치주의의 이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는 것이 흥미로운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가끔 영화나 다큐의 주제로 떠오르는 한국 법률 체계의 문제점이나  조문  자체의 흠결은(예를 들면 특정 조건을 형식적으로 만족시킴으로써 실정 법의 적용을 예리하게 빠져나간다든가정의와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이라는 트라이앵글의 균형을  맞춰보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법률가들의 두뇌 사이를 범죄자나 변호사 예리하게 빠져나가는 쾌감이 좋았다. (물론 논쟁의 티키타카 끝에 정의가 이겨야 마음이 편했다)


 두 번째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아는 것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나는 인간의 심리와 본질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시작은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관찰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나 고민의 골짜기들, 그리고 그것이 타인과 상호 작용할 때 일어나는 수많은 변칙들이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처음에는 현상을 기록하는데 집중했고, 다음엔 그 원인과 대안을 고민했다. 그래서 20대 초중반 나의 글들은 온통 인간의 심리나 좋은 관계에 대한 고민, 무엇이 서로를 위해 옳고 그른가 따위의 어설픈 가설과 시뮬레이션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느껴지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열심히 쏟아냈던 탓일까 어느샌가부터는 글을 쓰지 않아도 답답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깨닫게 된 바를 떠들고 다녀도 대부분의 일상과 보통의 사례를 해석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참담한 복수극을 담은 '올드보이'나 사이코패스 범죄를 재현한 '추격자'와 같은, 나만의 '빅 데이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레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최근에는 좀 다른 관점의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내 안에 깊게 자리한 악에 대한 공감과 고백의 좋은 기회라는 측면이다. 이 관점이 기존과 다른 지점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악에 대한 이해라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악을 품고 산다. 그러나 그 악에 대해서는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그를 섣불리 꺼내려할 때 일어나는 주변의 터부(taboo) 반응 때문이다. 이는 죽음을 이야기할 때와 비슷하다. 그것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혹은 그에 대한 다소 깊은 관심이나 논의들을 꺼내려할 때 나오는 '왜 자꾸 죽는 얘기 해' 또는 '너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식의 전조증상으로 이해하는 반응들이다. 때로 이 과잉반응들은 필요한 어젠다를 충분히 생각해보지도 못하게 만든다. 밖으로 꺼내진 악은 더 이상 악이 아닐 수 있다. 그 자체로 소멸되어 꺼지고만 불씨다. 진짜 악은 쉽게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무엇이다. '누군가의 머리를 도끼로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냐'는 질문은 어디까지나 머릿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물며 그 대상이 극악무도한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함부로 악을 꺼내어서는 안 된다. 욕설이나 불평도 허용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외에는 거리두기 대상이다. 이런 무조건적인 필터링은 일차원적인 방어에는 효율적이지만, 근본적인 대안 마련이나 행동 준거를 위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빼앗는다. 


나는 이것이 범죄 소설 속 범죄자의 모습을 통해 일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악의 끝단에 닿아 있는, 악의 무대에서만 비로소 '이야기가 좀 통하는 상대'와 좀 더 '본론'을 이야기할 수가 있다. 그 무대에서는 악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자유롭다. 어떤 사연으로 그러한 악의 씨앗이 생겨났고 무엇이 그를 발아하게 만들었는지, 왜 그것이 일상적인 방식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악의 한계선은 어디까지인지 등등. 반드시 필요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종의 기원'이 반가웠다. 화자가 1인칭 시점이어서 더욱 그랬다. 작가는 유진의 내면에 대한 세밀 묘사를 통해 실제 범죄자들이 했을 법한 생각과 행동들을 구현했다. 또 타인의 시선으로 구현되는 범죄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심리와 행동거지가 자연스럽고 힘이 있었다.  악이 어떤 생각과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주었다. 작가가 그토록 유진을 1인칭으로 데려오려고 노력했던 이유일 것이다. 현실 속 유진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까. 몇 없는 단서들로 선입견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유진을 따라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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