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 김애란]
친절하다. 김애란의 소설은 친절해서 아프다. 조금만 덜 친절했더라면. 조금만 더 날 배려하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를 잊어줬다면. 부디 내가 그를 보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알아도 모른 채 해줬다면. 글을 읽는 내내 가망 없는 부탁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내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여과 없이 그 실체와 민낯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냄새를, 형체를 어렴풋이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내 곧 그 소재와 질감을 이야기하였고, 더 나아가 그 안에 담긴 여러 사정과 감정과 무게들을 털어놓았다. 나더러 어쩌라고. 이렇게 던져놓고 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때때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도망칠 곳 없는 영화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 존재를 차마 마주할 수 없어,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눈을 질끔 감는 방법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 문장이 답답하고, 그다음 문장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다음 문장에선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말 그것만은 아니었으면, 그렇게만 되지 않았으면 하는 곳으로 내 손목을 힘껏 잡아 이끌었다. 나는 낙담했고,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친절하냐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어질 만큼.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같았다. '그럼 더 안 볼래? 그만할까? 보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얘기해, 당장이라도 멈춰줄 테니. 그런데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네가 눈을 감든 말든,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러면서도 이 고통스러운 문장들을 계속해서 읽었던 것은, 이 문장들이, 그 이야기들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어떤 본능적인 욕구 때문이었다. 대단히 높은 화질의 현미경 초점처럼, 어쩌면 내가 딛고 서있는 이 지면을 때로는 익숙한 방식으로, 때로는 낯선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분석해주는 듯했다. 내가 늘 보아왔던, 그러나 늘 지나쳐왔던 그 이면의 이야기들을, 모른 척 지나쳤던 어느 누군가의 말하지 못한 사연과 감정들을 아주 상세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말하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서 당혹스러우면서도 호기심이 생겼고 또 그렇게 된 이상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안전한 위치에서 가장 합법적인 방법으로, 가장 아슬아슬한 장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짝사랑했던 선배 앞에서 전에 없던 수치를 당하고, 정신이 나간채 방바닥에 누운 미영의 멘붕을 지켜볼 때나(『너의 여름은 어떠니』), 오랜 친구 사이에서의 미묘한 감정싸움의 단면을 볼 때나(『호텔 니약 따』), 성기를 최초로 인식하고 수치심을 갖게 된 이브처럼 손톱에 얽매인 어느 여자의 비루함을 지켜볼 때(『큐티클』)가 그러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나 결코 익숙하지 않았던 의견의 피력과 감정의 골, 사고의 흐름들. 대단히 신뢰할 만한 공정성으로 팩트(fact)를 실어 나르는 기자의 기사를 탐독하듯 읽어 내려갔다.
한편 경험 자체가 생소하게 다가온 소재들의 경우, 그 내면의 섬세를 음미하기 전 일단 그 생경함이 피부에 맞닿도록 허용하는 연습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교도소에 아들을 보낸 공항 화장실 청소부의 구토로 얼룩진 일일(一日)을 볼 때나(『하루의 축』),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아온 택시기사의 자존감을 볼 때나(『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깨진 콘크리트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불확실한 출산을 맞이하게 된 임산부의 무너져 내린 심리를 지켜볼 때나(『벌레들』), 녹색 테이프에 감겨 나무뿌리에 안겨 떠내려가는 엄마를 지켜볼 수밖에 없던 아들의 마음을 떠올릴 때(『물속 골리앗』), 잘 따르던 제자를 다단계 회사에 넘기고, 그 후배가 문고리에 목을 메달게 하는 모습을 봐야 했던 수인의 참사(慘事)를 지켜볼 때(『서른』)가 그랬다. 그러나 참담할지언정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동안 그 장면들을 못 보고 살아온,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양 지나쳐왔던, 내 안목과 시야가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소재의 익숙함 여부를 떠나 공통적으로 김애란의 글들이 갖는 특징들은 분명하다. 세련된 편집점과 적확한 표현, 구체적이고 치밀한 부연들.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권여선의 소설 '아직 멀었다는 말'의 추천사에서, 김애란은 자신이 가진 '소설관(觀)'을 내비쳤다. 그녀가 추구하는 문장과 작품에 대한 작가로서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골랐을 단어와 조사와 문장의 배치를 더욱 공들여 읽었다. 한 번으로는 채 소화시키지 못할 만큼 많은 양의 고민과 선별의 결과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책장을 다 넘긴 후에도 그것들을 내가 충분히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글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모으고, 또 써봤을까. 그건 비단 문장에 대한 욕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써야 '위로'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집착스럽고 지독하게 고민했을 책상 앞 그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얼마나 편하게 글을 쓰고 있는가, '인위(人爲)'가 메시지의 순결을 떨어뜨린다고 여기며, 가능한 '머릿속에 떠오른 그것을 날 것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기를 바랐던, 더하기(+) 보다는 빼기(-)에 초점을 두는 내 '수필관(觀)'이 여전히 유효한 위로의 방식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녀에게는 이 문장의 작업이, 회사에서의 내 보고서를 대하는 태도와 같았을까를 생각하며, 그럼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이란 것들이 그저 솔직한 일기 쓰기에 지나지 않는구나 했다가, 그럼에도 순수한 자기 고백이 줄 수 있는 감동은 소설이나 잘 짜인 기획 보고서가 줄 수 있는 위로와는 다른 면이 있다고 반박하면서. 설득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 했나. 그녀의 문장들은 그만큼 또 다른 '쓰는 이'로 하여금 대단히 인위적이고 준비된 글쓰기를 욕구하게 만들었다. 재료를 모으고 기둥을 세워보는 연습을 하고 싶어졌다. 상상만으로 부족한 부분은 인터뷰를 하고 부족한 부분은 하다못해 인터넷 간접 경험이라도 하면서.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