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딜런,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거야. 나는 네가 남겨두고 간 혼란 속에서 애쓰고 있어. 이 모든 일에 대해 네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렴. 우리에게 평화를 줄 답을 찾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줘. 도와다오. - 본문 중에서 -
이보다 더 클리볼드의 마음을 잘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한 글자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왔다. 답답한 독방에 갇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의 그 안도감처럼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님에, 나의 오늘이 아님에 감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럴 수 조차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먹먹하고 또 무거웠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제발 제발 이 모든 것이 영화고 드라마고 잘 만들어진 소설의 한 장면이기를, 부디, 도와줘. 도와다오.
하필 이 모든 악몽은 그 악몽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다가왔다. 좀 더 무뎠으면 좋았을걸, 좀 더 남의 행복에 무심하고 좀 더 내 안위만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고 중요해서, 그 밖에 다른 무엇도 보이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면. 글을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하필 타인의 섬세한 감성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이해할 만큼 직간접적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무슨 업보를 짊어졌기에 이 고통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나. 왜, 하필 수 클리볼드였나.
'차라리'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을 돌릴 수 있는 불행이었다면. '차라리' 소중한 사람을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만 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먹을 것 없는 황무지에 태어나 배고픔과 갈증을 갈구할 수 있었다면.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계속 그리고 지속적으로, '차라리' 일어났었으면 더 좋았을 '최악'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면, 잠시나마 행복 회로 속에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가벼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문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도록 아들을 방치했었더라면. 덜 힘들었을까.
부족한 나의 그릇과 내공으로는 차마 더 읽어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읽어야 했다. 그게 클리볼드를 위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촛불일 수 있길 바랐다. 어쩌면 클리볼드는 본인이 짊어져야 할 몫 이상의 너무 많은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졌을 때의 그 마음처럼, 어쩌면 클리볼드는 본인이 저지른, 그래서 응당 받아야 할 죗값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몫까지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내 짐은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깊은 존경과 미안함을 표한다.
이 글을 마치고 나면, 나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부끄럽고 두렵다. 당장 내가 떠안은 악몽을 벗어나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이 사실이 아프고 고통스럽다. 무겁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그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