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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Sep 18. 2020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속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딜런,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거야. 나는 네가 남겨두고  혼란 속에서 애쓰고 있어.  모든 일에 대해 네가 용서를 받을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렴. 우리에게 평화를  답을 찾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줘. 도와다오.   - 본문 중에서 -

이보다  클리볼드의 마음을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 문장을 읽고  읽었다.  글자  단어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왔다. 답답한 독방에 갇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의  안도감처럼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님에, 나의 오늘이 아님에 감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럴  조차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먹먹하고  무거웠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제발 제발  모든 것이 영화고 드라마고  만들어진 소설의  장면이기를, 부디, 도와줘. 도와다오.

하필  모든 악몽은  악몽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느낄  있는 사람에게 다가왔다.   무뎠으면 좋았을걸,   남의 행복에 무심하고    안위만을 바라볼  있는 사람이었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무엇보다 우선이고 중요해서,  밖에 다른 무엇도 보이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면. 글을     적어 나간 딜런의 엄마,  클리볼드가 하필 타인의 섬세한 감성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이해할 만큼 직간접적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무슨 업보를 짊어졌기에  고통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나. , 하필  클리볼드였나.


 '차라리'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을 돌릴 수 있는 불행이었다면. '차라리' 소중한 사람을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만 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먹을 것 없는 황무지에 태어나 배고픔과 갈증을 갈구할 수 있었다면.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계속 그리고 지속적으로, '차라리' 일어났었으면 더 좋았을 '최악'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면, 잠시나마 행복 회로 속에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가벼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문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도록 아들을 방치했었더라면. 덜 힘들었을까.

부족한 나의 그릇과 내공으로는 차마 더 읽어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읽어야 했다. 그게 클리볼드를 위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촛불일 수 있길 바랐다. 어쩌면 클리볼드는 본인이 짊어져야 할 몫 이상의 너무 많은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졌을 때의 그 마음처럼, 어쩌면 클리볼드는 본인이 저지른, 그래서 응당 받아야 할 죗값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몫까지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내 짐은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깊은 존경과 미안함을 표한다.

이 글을 마치고 나면, 나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부끄럽고 두렵다. 당장 내가 떠안은 악몽을 벗어나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이 사실이 아프고 고통스럽다. 무겁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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