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겨울이었다.
요즘 같은 생태환경에서는 야생 토끼를 직접 목격하기도 힘들지만 마주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인데, 어느 날 야외 화장실에 갔다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잿빛 털을 가진 산토끼였다. 습성상 야생동물은 사람과 마주치면 으레 날쌔게 도망치기 마련인데, 어찌 된 경우인지 토끼는 나를 보고도 내빼지 않고 그대로 화장실에 머물러 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기에는 화장실 안이 제격이겠거니 하고 생각도 들었지만 사람에 쉬이 놀라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성격이 꽤 온순한 토끼 같아 보였다.
이에 '어쩌면 토끼를 한번 쓰다듬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치기 어린 생각이 들어서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근데 바로 그 순간, 나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느꼈는지 멀뚱히 서있던 토끼가 문을 통해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었어' 속으로 말하며 실패를 체념하고 아쉬운 마음에 토끼의 뒷모습을 눈길로 좇았는데, 어째 토끼가 멀리 가지 않고 바로 가까이서 나에게 곁눈질을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토끼는 나에게서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설마 이 토끼가 어린 토끼라 태어나서 사람을 처음 보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몸을 바짝 쭈그려 앉아 상냥한 자세를 내보였다. 그리곤 해치려는 것이 아님을 두 손 내밀고 토끼에게 표현했다. 그러자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인지 토끼는 나에게로 점점 다가오는 것이었다. 토끼가 다가올수록 야생 토끼를 매만지는 것이 주는 행복감이 찾아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내게 있어서 토끼는, 도로변 사체로서만 만나는 것이 전부였는데 살아있는 토끼가 이렇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에 매우 흥분됐다. 나는 연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가락 끝을 까딱거리며 토끼를 애원했다. 마치 주문을 걸듯.
그렇게 토끼의 털 자락이 내 손끝에 느껴질 찰나, 어찌 된 일인지 토끼가 냉큼 내 양손을 엇나갔다. 방향을 틀고 내게서 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이내 두 귀를 접고 총총걸음으로 나에게서 멀어져 사라졌다.
다음날, 집 뒤 풀숲에서 어제 그 토끼를 또 보게 되었다. 어제처럼 나는 토끼를 반기진 않고 있었다. 토끼에 대한 관심이 이미 식어버린 것이다. 야생 동물에게서 반려 동물의 친숙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터였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토끼에게 토라져 버린 나였다.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스치지도 못한 사이지만 동물 토끼를 떠올리면 그 토끼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