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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병수 Mar 31. 2019

박스집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을 꿈으로 여겨야 하는 월세살이의 시대. 다른 이들도 있었으려나…어릴 적 내게 특별했던 집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동네에 대형 냉장고 박스가 길거리에 나왔고, 동네를 샅샅이 활보하던 우리들은 마치 개미처럼 함께 줄지어 머리에 이고 공영 주차장으로 박스를 옮겼다. 그리고는 주차장 구탱이에 자리를 틀었다. 알맹이만 쏙 빠지고 바로 버려진 박스라 매우 깨끗했고 그 안은 포근했다. 그날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아지트로 정했다. 


동네를 떠도는 것에만 익숙했던 우리에게 박스 아지트는 우리를 품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우리는 더없이 행복했다. 박스에 딸린 손잡이를 제치면 그 사이로 햇빛도 들어와 불을 밝혔고, 서로 둘러앉아 비밀을 떠들기에 셀 틈이 없는 독립된 곳이었다. 다만 함부로 움직이면 구겨지고 망가질까 싶어 쥐구멍 속 얌전한 쥐처럼 아지트 안에서 조심스레 움직였다. 


누군가는 이불을 가져다놓자는 얘기도 했고, 이곳에서 우리끼리 평생 살자는 말도 했지만, 역시나 아지트는 아지트답게 우리가 내킬 때면 찾게 되는 쉼터였다. 갈 때면 꼭 간식거리를 챙겨갔고 우리는 매번 생라면을 부셔 먹거나 몇 봉의 과자와 음료로 아지트에서 잔치를 벌였다. 서로에게 재밌는 얘기를 떠벌리거나 우스갯소리에 다 함께 자지러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변변치 않게 차려 놓은 먹을 것과 별것도 아닌 사소한 얘기에 만족해하며, 박스 아지트는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맘껏 머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시간이 지나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해 천막까지 뒤덮인 우리들의 아지트를 바라보며 만족해하던 그날의 내가, 곁에 있던 동네 아이들의 흐뭇한 미소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어느 날 조용히 찾아와 아늑함으로 우리를 따스히 이어줬던 그 박스는, 단순히 종이상자의 의미를 넘어 우리들에게 '집' 그 자체였다. 그때의 그곳을 떠올리며 오늘날의 '집'이란 어떤 의미여야 할지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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