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기에 더 빠른 나를 만나는 법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스물세 살, 태어나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 배낭여행의 계획 말미에
혼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단 사실을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부모님께 얘기드릴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그 길이 유명세를 얻었지만, 당시에는 설명을 해도 아무도 몰랐고,
참고할만한 자료라고는 대형 서점 구석에서 찾아낸 딱 한 권의 작은 가이드북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연히 그 길을 알게 된 이상,
뭔가에 홀린 듯 항공권 결제부터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물집 속의 물집 속의 물집과 함께,
지금의 나라면 다 버렸을 내 몸집만 한 수많은 짐을 배낭에 다 때려 넣고
참으로 힘겹고 고집스러운 순례길의 여정을 마쳤다.
오래 걷기나 등산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내가 순례길에서 처음 신는 등산화가 잘 맞았을 리 만무했다.
맞지 않는 등산화에 발은 이미 이튿날부터 만신창이. 그 상태로 하루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날, 멕시코에서 온 루시 아주머니가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속도가 나지 않는 나를 도와주려고, 자신의 딸도 앞서가도록 먼저 보내고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에게 춤을 같이 추면서 골반의 반동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 보자고 말했다. 빗속의 광란의 댄스파티를 벌이며 웃음과 눈물이 범벅된 채로 우리는 그날 16시간을 걸었다.
길에서 만난 산티아고 친구들이 내 발을 보더니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난 고행하러 왔으니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던 이들이 짐을 잠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러면 이곳에 온 의미가 없어진다며 단 한 번도 짐을 넘기지 않았다. 안 맞는 등산화에 발이 악화되어 갈 때 모두가 시내에서 샌들을 사야 한다고, 지금처럼 슬리퍼를 신고 이 길을 계속 걸으면 발등뼈가 부러질 거라는 말과 함께 시내의 신발가게만 보이면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여기서 그런 소비를 하면 의미가 없어진다고 버티고 버텼다. 미련하게도 가지고 있던 버켄스탁 슬리퍼를 신고 남은 절반이상의 여정을 모두 완주하고야 말았다. (그땐 정말 미안했다 내 발등아)
여정 중간에 진작 찢어져 명을 다했지만 이를 악물며 끝까지 나와 함께해준 그 슬리퍼는,
여정이 끝에 다다랐을 때 누더기가 된 채로 영광스럽게. 마지막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부근 어딘가에서 고이 보내주었다.
다녀온 후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출발할 때 가지고 있던 고민이 해결되었는지?'이다.
내 대답은 No. 하지만, 더 중요한 게 달라져 있었다.
출발하기 전, 나의 과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은데에 비해 원하지 않는 전공과 대학을 가게 된 현실, 하고 싶은 것과 현실의 괴리가 컸고 앞으로의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잃은 상태였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이러한 '대기' 혹은 '사면초가' 상태에 대한 답을 빨리 얻고 싶어서, 벼랑 끝으로 나를 몰아서라도 답을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방황도 이왕 할 거면 극단적으로 제대로 하자라는 마음으로 모든 수업을 나가지 않고 올 F를 받고야 말았다. 고민이 깊어질 수록 당시 빠져있던 흑인음악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고 또 몰두했다.
그런 나와 친했던 동기무리는 이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었고, 그중 다수는 나처럼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어했었다. 하루는 그중 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뭘 위해서 이렇게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 동기는 이렇게 답했다. "전공이 너무 싫지만 대충 B+이라도 맞아서 삼성 가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질문했으나 크게 답변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공 공부가 즐겁다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그런 고민을 하는 친구는 없었다. 외골수 스타일이었던 나는 할 거면 정말로 제대로 해서 1등 하던지, 아니면 말고 싶었다. B+의 대학, B+의 인생은 정말이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취업을 위해서 지금 하기 싫은 걸 적당히 중간만 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취업을 해봤자 똑같은 일을 하며 시간만 가길 바라는 인생이 될 텐데..
당시에는 정말로 간절했다. 시험을 치르지 않아 F를 받는 와중에도 시험 끝나는 시간 맞추어 그 교수님과 식사를 하러 등교할 정도로 학교 생활은 참 재밌게 했다. 낮에 수업은 하나도 안 듣고 저녁때쯤이 되어서야 매일 학교에 나타나 유일하게 의미를 느끼던 음악 공연 준비에만 그 에너지를 그대로 쏟았다. 그 와중에도 속은 타들어갔다. 매일 고뇌하고 방황하고 기도하고 글을 썼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방황의 시간은 계속되어 매 학기 학사경고가 누적되어 나는 결국 학교에서 잘렸다. 벼랑으로 몰아보자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내가 무려 학교에서 잘렸다는 이 이야기를, 부모님께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는 것인지 매일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 과정은 차차 얘기하도록 하고... 결론적으로 그 얘기를 처음으로 부모님께 오픈하던 날, 엄청난 호통과 혼남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허허 너 참 깡도 좋다~" 유쾌했던 그 한마디를 잊을 수 없다.
그때 알게 된 나의 깡 때문이었을까.
난 혼자서 결국 산티아고를 다녀왔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고 고집스럽게.
그리고, 딱 하나 바뀐 것은,
바로 내 앞에 놓인 것을 대하는 내 태도였다.
지금 주어진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아무리 안 맞는 것일지라도 그걸 바꾸고 피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내 이름 걸고 목숨 걸고 그걸 해보고,
그것과 싸워 이긴 다음에야, 그제야 내 손으로 버리더라도 멋있게 버릴 거라고.
그러니, 일단 그게 뭐가 됐든. 싸워서 이길 거라고.
죽을 각오로 한번 해보고 나서, 그때도 내가 이기는지 못 이기는지 보라고.
잊고 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정말로 순수하고도 충만하게 차올랐다.
문과 교차 지원생이었던 나를 힘들게 했던,
마치 외계어 같았던 이과 과목들은, 내 수업의 다른 분반 것들까지,
맨 뒷자리에서 조용히 하루에 3개 반을 내리 들었다. 들릴 때까지. 이해될 때까지 질문했다. (죄송했습니다 교수님) 종강할 때는 교수님들께서 학생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학생이라며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이런 학생을 만난 것은 교수로서 영광이라는 말씀을 하신 분도 계셨다.
결국 나를 괴롭혔던 과목에서 줄줄이 1등을 하고 나니,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기회들이 보였다. 이 학교 안에서도 내가 관심 있던 과목들이 보였고 공대 7 전공을 몸이 부서져라 죽을 각오로 해내면서 졸업 학기가 되어서야 겨우 복수전공에 합격했다. 평점 0.0의 제적당한 학생에서, 성적이 우수한 공대 복수전공생이 되기 까지의 눈물겨운 과정을 본 함께 졸업하던 동기들은 노래만 하던 내가 졸업을 하는 것도 신기한데 본인들보다 학점이 높고 복수전공까지 했단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가고 싶었던 학교의 학과로 편입에 합격했다.
무엇이 나를 변화하게 만든 걸까?
산티아고에서 힘겹게 내딛는 한걸음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으나 그 답을 정확하게 찾지는 못했다. 다만,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그런 다짐들이 샘솟았다.
그 다짐은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어떤 일을 할 때 "정말 죽을 각오로 했는가?"를 스스로 되묻게 한다.
산티아고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동안 이런 마음으로 달리게 해 주어 참 고마웠다고.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디쯤 와있는지 그때의 내가 바랬던 모습이 맞는지.
그게 아니라면, 당장 내 앞에 놓인 혹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 다시금 되물어본다.
지금, 정말로 목숨을 다해 노력하고 있느냐고.
혹시라도 다시 길을 잃었다면, 다시 길을 걸을 때가 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