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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Dec 05. 2023

최고의 의전

순천, 의전

최고의 의전


새로운 만남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그게 외국인이라면 더 그렇다. 지난 11월 26일(일요일), 여수로 가는 케이티엑스를 탔다. 우리 팀에서 담당하는 국제 방제 전문가 교육과 국제 협력 회의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팀은 같은 기차를 탔지만, 여수역에 내려서야 얼굴을 봤다. 다들 표정이 밝았다. 모두 나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일주일치 옷가지 등이 든 가방을 밀고 있으니 마치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저녁은 아귀 대창찜과 서대회를 먹었다. 원래 가려던 음식점이 문을 닫아서 들렀는데, 세 명이 소주 두 병을 비우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진행하는 교육은 내부 직원을 대상으로, 몇 년간 해 온 거라서 크게 부담이 없었다.

 

월요일 아침, 교육생들은 살짝 긴장돼 보였다. 외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진행하는 교육인 데다가 초면인 사람들도 많아서였다. 열 시가 되자, 영국과 싱가포르에서 온 여성 전문가 세 명이 강의실에 들어섰다. 나는 그녀들과 명함을 교환하고, 교육생과도 정식 인사를 나눴다. 나는 교육생들에게 동시통역이 지원되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고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어학 실력과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동기 부여만 얻는다면 성공한 거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우선 교육생 열네 명을 세 개 분임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의 수업은 분임원끼리 토론하고,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강사들은 각 분야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강의 실력도 뛰어났다. 재미있게 가르쳤고, 퀴즈로 교육생의 참여를 끌어냈다. 교육생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강사가 질문 있냐고 물을 때만 빼고 말이다. 그 순간이 되면 강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교육생은 강사를 배려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가끔 강의해 보면서 큰 박수보다 좋은 질문이나 격려 한 마디가 더 큰 힘이 된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나는 수업이 끝날 때마다 교육생을 대신해 손을 들었다.

 

그날 저녁에는 전문가들과 식사하기로 했다. 나는 굴 요리 전문점을 추천했다. 유튜브에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굴 가격에 놀라는 것을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노포 식당에는 현지 주민이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굴구이, 굴전, 생굴 회무침까지 골고루 시켰다. 외국인들은 굴의 양과 맛, 가격에 엄지손가락을 연신 치켜세웠다. 어색한 발음으로 “맛있어요.”라는 찬사도 빼놓지 않았다. 외국인들이 원하는 데는 고급 요릿집보다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토속적인 한국 식당일 수도 있다. 영국에서 온 스잔나는 그날을 태어나서 가장 굴을 많이 먹어 본 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수요일 아침, 슬슬 목요일에 하는 국제회의가 신경 쓰였다. 올해 처음 하는 행사인 데다가 필리핀 해양경비대 환경보호 사령관(국장급)과 미국 해양경비대 직원, 국내 전문가도 참석하기 때문이다. 상사들에게 교육 진행 상황과 내일 계획을 정리하여 문자를 보냈다. 그때까지 잔잔했던 내 마음은 전화 한 통으로 요동 쳤다. 아침 회의에서 계획 보고가 제대로 안 됐고, 필리핀 사령관 의전도 준비가 덜 된 것 같다고 질책했다고 한다. 우리는 여러 번 보고했고, 의전도 나름 준비했는데, 대꾸해 봤자 핑계로 들릴 게 뻔했다. 잘해 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는 게 속 편했다. 사실 의전이라는 게 별 거 없다고 생각했다. 캐나다서 열린 국제 회의에 두 번 참석해 보면서 우리나라만 유별난 것 같았다. 형식적인 의전은 간소화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다. 인천공항에서 여수까지 편하게 모실 준비는 이미 마쳐있었다. 나는 팀원들과 미흡한 것들을 좀 더 보완하고, 필리핀 사령관 마중을 나갔다. 다행히도 필리핀 사령관은 매우 소탈한 분이었다. 점심은 생선구이 정식, 저녁에는 소주와 맥주, 막걸리까지 섞어 한국의 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드렸다.

 

목요일, 국제회의가 열렸다. 국제 전문가와 내부 전문가들의 자리를 배치하고, 음향도 최종 확인했다. 사회는 내가 맡았다. 국장님의 환영사로 시작했다. 다음은 내빈을 대표해 필리핀 사령관이 인사말을 했다. 다행히 전날 느낀 한국의 정을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다. 회의는 계획했던 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모든 참석자가 만족스러워했다. 국장님은 돌아가는 기차에서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내게 문자를 보냈다. 7시부터 시작한 치킨과 맥주를 곁들인 뒤풀이도 완벽했다. 외국인들은 아홉 시에 마친다고 하니 조금만 더하자고 외쳤다. 뭔가 부족할 때 끝내야 여운이 오래간다는 걸 알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참석자가 남녀를 교차하며 상대를 지목한 후 러브샷을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금요일, 날씨가 춥다는 예보는 다행히 맞지 않았다. 여수서에서 진행하는 훈련에는 여러 기관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외국 전문가들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에 놀라워했다. 오후에는 순천만 습지를 답사했다. 순천만 주변 논에는 흑두루미와 같은 철새 수천 마리가 내려앉았고,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았다. 철새의 울음소리에 외국인들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누렇게 핀 겨울 갈대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을 받아 은빛 물결을 일으켰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전해야 최고의 관광 자원이 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토요일, 나는 여수에서 가족과 여행을 즐길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오늘 떠나는 필리핀 사령관이 신경 쓰였다. 사실 수요일도 종착역인 여수역이 아니라 여천역에서 내려, 당황했었다. 숙소가 여수역에서 1km 떨어져 있고, 수행하는 직원에게 가는 방법을 여러 차례 알려 줬지만 불안했다. 나는 아침 일찍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모시러 갈 테니까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고맙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호텔은 결혼식 손님으로 붐볐다. 사령관은 약속 시간보다 빨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장인, 장모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 차로 역까지 모셨다.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짧은 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큰짐이 네 개를 역 앞에 내려 두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사령관은 주머니에서 필리핀 해양경비대의 기념 메달을 꺼내 내 목에 걸더니 사진을 찍자고 했다. 어쩌면 사령관에게 최고의 의전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했던 이날의 동행이 아니었을까!

 

일요일 새벽, 필리핀 해양경비대 여직원은 마닐라에 잘 도착했고, 한국에 머무는 동안 환대해 주고 도와줘서 고맙다며, 앞으로 또 만나길 바란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그날 그 호텔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은 이제 헤어짐이 주는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바뀌었다. 바다는 하나이고, 우리는 그 공간에서 일하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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