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깊은 바다 Apr 13. 2024

이를 심다

치과, 임플란트

올해 집이 있는 목포로 발령이 나면서 여러 계획을 세웠다. 이를 손보는 것도 그중 하나다.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는 나를 치과에 보냈다. 원양 실습을 나가면 10개월쯤 바다에서 내는데, 아프지는 않을지 걱정됐나 보다. 의사는 내 이를 보더니 왜 이제야 왔냐고 말했다. 양쪽 어금니가 검게 썩어 뭉그러졌다. 충치 두 개를 뽑고 금이 주성분인 치아 브리지(빠진 치아의 양옆 치아를 삭제하고 크라운으로 연결하는 인공 치아)를 했다. 치료비는 200만 원이 넘었던 것 같다. 그 뒤로 25년이 흘렀다. 작년 어느 날, 후배가 내 입 주위를 바라보더니 혹시 담배 피우냐고 물었다. 그는 돌려서 말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구멍 난 양말을 들킨 기분이다. 그 뒤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입을 최대한 오므린다.


며칠 지나서 회사 근처 치과에 다. 2년 만이다. 안 좋으면 더 자주 가야 하는데, 그 반대다. 무섭고, 창피해서다. 악순환이다. 의사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부끄러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의사는 이 사이에 누렇게 낀 치석부터 없앴다. 잇몸도 치료했다. 치아 브리지도 닳아서 임플란트를 빨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대신 오래 걸리고, 다 하고 나서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집이 있는 데로 가서 하라고 했다.

    
지난 4월 5일 식목일, 이를 심기로 했다. 미루다 보면 또 한해를 넘길 것 같았다. 임플란트는 '안에다(implant, in)'와 '심는다(plant)'는 말의 합성어라고 한다. 턱뼈에 티타늄으로 만든 나사를 심고, 그것을 뿌리 삼아, 빠진 치아를 대체하는 보철물을 끼우는 치료 법을 말한다. 나무만큼은 아니지만, 이를 심는 것도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가 좋으면 음식물을 잘 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식량 소비뿐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소화 불량으로 나오는 인체 가스도 마찬가지다. 소의 방귀나 트림에서 나오는 메탄이 기후 위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말이다.


치과 갈 생각에 잠을 설쳤다. 유튜브로 임플란트 술 영상을 괜히 봤다. 치과에 가는데 정신이 멍했다. 병원은 깨끗했고, 잔잔한 음악 흘렀다. 이를 가는 드릴 같은 기계 소리와 여러 소음이 섞여 간헐적으로 들렸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좀 전에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성한 치아를 세어 보니 열 개쯤 다. 의사는 치료 방법을 설명했다. 여러 번 들었던 얘기라 무덤덤했다. 상담실장은 대략적인 치료비를 알려 주면서 내 의사를 물었다. 다행 회사 협약 병원이어서 인천 치과보다 가격이 쌌다. 게다가 조금 더 아 주겠다고 했다. 상담실장은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물었다. 가격을 흥정하는 게 우습지만 그러자고 했다. 이미 각오해서 결정도 쉬웠다.


의사는 파란색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빠르게 뛴. 이 순간이 가장 무섭다. 마취 주사를 놓았다. 따끔하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다. 마취약이 퍼지면서 입 주위가 얼얼해졌다. 의사는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를 비웠다. "내가 죄를 많이 지었는 갑소." 옆 진료실에서 힘없이 그러나 또렷하게 흘러나온 말이다. 말투와 내용으로 추정해 보자면, 70대쯤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치아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다. 당연히 돈부터 신경 쓰였겠지. 물론 두렵기도 하고. 의사는 말했다. "어머니, 그렇지 않아요." 나도 의사의 말에 공감했다. 열심히 산 게 죄는 아니다. 나이 들면서 이가 부쩍 안 좋아진 우리 부모님처럼 말이다.


마취가 잘 된 걸 확인한 의사는 색 바랜 치아 브릿지를 벗겨내는 데 집중했다. 치료하는 내내 할머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도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걸까! 나는 혼자서 재판을 시작하며, 잘못한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먼저 선생님 말씀을 안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이를 닦으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초등학교 건강 검진 때 치과에 꼭 가 보라고 했는데 그냥 넘겼다. 다음은 부모님을 속였다. 어머니 돈을 허락 없이 가져가거나, 아버지에게 거짓말해서 챙긴 돈으로 군것질했다. 이 때문에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번 돈을 쓰게도 했다. 자아비판에 집중하는 사이 25년 가까이 내 이를 둘러싸고 있던 금속물이 벗겨졌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때 이를 빼면 지붕에 던지라고 줬다. 까치가 새 이를 줄 거라고 했다. 간호사는 찌그러지고 닳은 금 이를 비닐에 담아 건넸다. 이번에는 지붕에 던지는 대신 금은방에 팔 계획이다. 그러면 임플란트 하는 데 보탤 돈이 나온다. 치아 상태도 확인했으니, 판결만 남았다. 의사는 선고했다. 치료 기간 6개월, 치료비 420만 원. 게다가 다 끝날 때까지 술도 못 마시고, 음식도 제대로 씹을 수 없다. 이제는 부모님 대신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5월부터는 죗값을 치른다. 이를 다 심고 나면 잘 관리할 계획이다. 6개월에 한 번은 누런 치석도 없애야지. 누군가는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잘못 관리하면 생기는 고통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치과에 올 때마다 얻는 교훈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를 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