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목이 칼칼하다. 이럴 때는 애절하면서도 목마른 표정을 지어야 한다. 가끔은 한잔하자고 대놓고 말한다. 아내는 맨날 술이라며 나무란다. 그러면서 이번만 봐준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냉동실 문을 연다. 맥주 캔에는 이미 보얀 김이 서려있다. 그래서 조급하면 지는 거라고 하나 보다.
아내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크리스털 컵을 꺼내고, 잔잔한 음악을 튼다. 불그스레한 조명도 켠다. 나는 목을 축이는 게 우선이다. 두세 모금은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켠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맥주는 목줄을 타고 내장을 미끄럼틀 타듯 훑고 지나간다. 그러면 삶의 갈증과 피로도 시원하게 휩쓸린다.
나이 들면서 주량은 줄었다. 두 캔이면, 눈이 살짝 풀린다. 아내는 분위기만 즐겼으니, 술을 이제부터시작할 기세다. 아내가 날카롭게 째려본다. 자기 잔이 다 빌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란다. 분위기를 보니, 잊을 만하면 꺼내는 이야기를 또 하려나 보다. 그래도 말투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제는 살짝 웃기도 한다. 그래도 무안쩍긴 마찬가지다. 아내는 물었다. “오빠! 왜 그때 거짓말했어?”
20년 전, 회사 선배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쯤 내게 궁금한 게 있다고 했다. "혹시, 발령은 안 나세요.?" 내 머리는 아주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거의 안 날 거예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 기억엔 그렇다. "거의"를 아주 작게 말했던 것도 같지만.... 아내는 내가 분명히 발령이 나지 않을 거라고 했단다. 나를 반려자로 결정하려는 최종 질문이어서 정확히 들었단다. "거의"를 하지 않았거나, 그게 집사람 귀에 들리지 않았다면, 나는 결혼하고 8년이 지나서, 완벽한 거짓말쟁이가 됐다.
2003년 입사하고 10년까지는 목포에서 근무했다. 그러니까 여덟 번의 결혼기념일까지였다. 아들은 여섯 살, 딸은 네 살이었다. 다음 해,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료들은 5년이 넘어가면 대개 다른 관서를 이삼 년 다녀왔다. 나도 갈림길에 섰다. 승진하려면 인천, 집에 자주 오려면 완도였다. 나는 왼쪽 길을 선택했다. 힘은 들겠지만, 목적지에 다다르면 멋진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 후로 10년 중 7년을 갈매기아빠(직장 때문에 가족을 두고 홀로 떨어져 사는 아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살았다. 올해 다시 목포로 내려왔을 때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딸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동안 아내는 육아를 떠맡았다. 나는 주말에만 잠시 들렀다 가는 나그네였다. 육아의 강도와 내 거짓말을 추궁하는 세기는 비례했다. 그러면 눈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게 상책이다.
나라고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가족 생각에 창밖만 바라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내가 사춘기 아이들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전화할 때면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 능력도 안 되면서 여길 왔냐며, 다시 보내 버리겠다는 상사의 모진 말에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장 그렇게 해 주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을 용기도 부족했다. 때로는 내가 고른 길을 원망하고 후회하며 투덜댔다. 그러면서 조금씩 계속 걷고 있었다. 인천에서 목포까지 오가려면 10시간쯤 걸린다. 전부 합해 보면 무려 넉 달을 버스에서 보냈다. 그 시간은 몹시 힘들고 지루했다. 10년을 보내고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만큼 순간이었다.
그 길에서 가끔은 미끄러지고, 이리저리 헤맸다. 좀 더 수월한 데로 돌아가고 싶어 갈등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갈 방향을 알려 주기도 했다. 아내는 내가 지치면 얼음보다 차가운 맥주를 내밀었다. 형사처럼 내 거짓말을 추궁하기는 했지만.
인내하고 버티며 노력하다 보니, 걷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러자 그 길은 더 많은 걸 내주었다. 목적지에서는 내 능력과 노력보다 더 큰 성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길은 내가 걷는 이상으로 내어 주는 데였다. 하지만, 10년 전 그 갈림길에 놓인다면 똑같은 고민을 할 것 같다.
올해 목포로 내려왔다. 가장 큰 행복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가족과 함께 사는 거라고 답하고 싶다. 출근하면서 아이들을 보고, 퇴근해서 저녁을 같이 먹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걸 매일 느낀다. 이것도 그 길에서 얻은 소득일까! 12년 후면 정년이다. 직급이 오르다 보니 2년에 한 번은 반강제로 다른 데로 가야 한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험한 곳일 수도 있다. 반대로 아름답기만 하고, 수월할 수도 있다. 거기서 또 다른 걸 보고, 배우고,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 물었다. 다시 그 갈림길에 선다면, 어디로 가는 게 좋겠냐고. 아내의 답은 짧고 명확했다. 당연히 거기라고. 왜냐고 물으니, 답했다. 지금 행복하지 않느냐고. 요즘 아내가 추궁할 때 살짝 웃는 이유다. 그러면서 또 말한다. "그때 거짓말 한 거는 맞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