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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Apr 28. 2024

우주 황씨입니다

우주는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를 말한다.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이라고 부르는 대폭발로 생겨났다. 모든 에너지와 물질도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지구와 인류도 마찬가지다. 곧 우주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자 원천이다. 내가 우주와 별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35년 전,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 달쯤 지 어느 날이었다. 숲의 신록은 짙어지고, 날은 무더워지고 있었다. 그날은 역사 수업을 밖에서 한다고 했다. 우리는 논길을 따라 걸었다. 모내기하려고 물을 채운 논에서 윤슬이 잔물결을 치며 반짝거렸다. 나는 도랑을 헤엄치는 붕어 새끼를 보다가 뒤로 살짝 처졌다. 선생님은 어느 순간 나와 함께 걸었다. 서른 가까이 먹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딱 봐도 역사를 가르칠 것처럼 생다. 좀 더 자세히 떠올려 보자면 무뚝뚝해 보였고, 목소리는 과묵했으며, 얼굴은 역사책에 나오는 조선시대 선비를 닮았다. 풍채가 있으니 중국 학자가 더 잘 어울렸던 것도 같다. 선생님은 이름 물었다. 나는 "황 00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본관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선생님 반응이 짐작돼서다. 흘려듣기를 바라며 겨우 들릴 정도로 말했다. “우주 황 씨입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허무맹랑하다는 듯 되물었다. “우주?” 그러면서 피식 웃었다. 다행히 거기까지였다. 더는 묻지 않았다. 수치스럽거나 창피하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게다가 지어낸 것도 아고, 타고났는데 어떡하겠는가!

      

우주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다. 선생님이 본관을 알아 오라는 숙제를 내줬다. 아버지께 물었더니, 무슨 파이며 몇 대손인지까지 자세히 알려 줬다. 들으면서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공책에 적었다. 다음 날, 선생님은 돌아가며 발표하라고 했다.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무언가 잘못 돼가는 것 같았다. 친구들 본관은 대부분 초등학생인 내가 들어도 아는 지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서울도, 한국도, 지구도 아, 우주였다. 결국 내 순서가 왔다. 나는 일어서서 말했다. “저는 우주 황 씨입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몇몇 친구가 옆에서 잠시 키득거릴 뿐이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다시 물었다. "왜 우리는 본관이 우주인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2, 3일 지났을 때였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역사 선생님이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산책하는 중이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선생님 그날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우주 황씨가 명문 집안이더라." 선생님, 그것도 역사 선생님이 내 본관을 인정해 준 순간이었다. 나는 비로소 완한 우주 황씨가 된 것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폐지다. 그 뒤로 100년 넘게 지났으니, 조상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크게 상관없다. 누가 묻거나 따지지도 않는다. 단지 우주 황씨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선생님 말씀을 전했다. 아버지도 신이 난 듯 목소리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는 족보까지 펼쳐가며 우주 황씨의 원을 알려 주었다.

      

우주 황씨는 시조 황민보가 태어난 전라북도 완주의 옛 지명인 우주(紆州)를 본관으로 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宇宙)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오래전 경향신문에는 '태국 태씨, 대마도 윤씨,  우주 황씨... 이런 성씨도 있었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아마 기자도 동음어 때문에 오해했던 것 같다. 내 본관을 말하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꼭 부연해서 설명해야 한다. 우주 황씨는 약 2만 5천 명이다. 그래서 같은 본관을 만나면 더 반갑다. 외국에서 같은 아파트 사람을 마주친 기분이랄까! 그래서 아버지나 내 항렬(같은 대수의 혈족끼리 공유하는 이름자)의 이름을 보게 되면 본관을 물어보곤 한다. 아쉽게도 이렇게 해서 일가를 난 적은 없.


글을 쓰다가 소파에 누워 있던 중학생 딸에게 우리 본관이 어디인 줄 아냐고 물었다. 딸은 알 것 같다며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집 본관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생각났다고 했다. "우리 집이면 거실!" 아내와 내가 크게 웃으니, 딸은 당황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전주 이씨 같은 거."라고 알려 주자, 딸은 "! 맞다. 우주"라고 했다. 아들과 딸은 왜 우리 본관이 우주인지 묻지 않는다. 이제는 그걸 설명할 기회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우주라는 본관을 별자리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본관은 자신의 혈통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일한 혈족끼리 단합을 공고히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동성동본 간의 혼인을 막기도 했다. 농경 시대에 모여 살면서 노동력을 공유하거나 서로 울 수도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산업화되고, 집성촌도 사라지면서 본관끼리의 결속력 많이 약해졌다. 촌수로 사촌만 넘어서면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일이 많다. 시대가 좀 더 흐르면 본관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족보를 찾아봤다. 아버지와 내 이름을 넣으면 조상과 일가까지 쉽게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우주 황씨 30대손이다. 족보와 본관에 관심이 커지는 걸 보면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 황씨를 만나면 입이 근질거린다. 넓고 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별이다. 새로운 별은 계속 탄생하고 또 사라진다. 우주는 우리가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큰 시공간이지만, 우리의 고향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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