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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05. 2024

무화과를 심다

<50살이 되기 전에 한 50가지 일>

무화과의 꽃말은 '풍부', '다산', '풍요로운 결실'이다. 나는 여기다 '기다림'을 보태고 싶다. 무화과는 싹이 나는 순간부터, 열매를 딸 때까지 기다리고,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6년 전, 무화과의 매력에 빠졌다. 당시 회사 화단에는 무화과나무가 스무 그루 가까이 있었다. 청사를 새로 지으면서 심은 건데, 3년이 넘어가면서 열매가 엄청 달렸다. 결실을 맛볼 기회는 일찍 출근하는 직원에게 주어졌다. 새벽잠이 없던 나도 단골이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무화과를 잡아서 오른쪽으로 반 바퀴쯤 돌리면, 툭 하고 떨어졌다. 줄기에서 하얀 진물이 흐르면서, 여름내 머금은 열기를 상큼한 향기로 뿜어냈다. 지중해와 중동이 원산지인데, 그곳에 서 있는 기분이다. 맛도 기가 막히다. 바로 따 먹으니 신선했다. 과즙은 풍부했고, 달콤했다. 감도 일품이었다. 다음 날이면 마법같이 새 열매가 달다. 그래서인지 여명이 비칠 무렵이면, 화단 주변을 서성이는 직원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지난 1월, 4년 만에 다시 발령 받아 목포로 내려왔다. 첫날, 점심을 먹고 청사 주변을 산책했다. 기대는 머지않아 실망으로 변했다. 그 많던 나무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의 설에 따르면, 누군가의 지시로 다 베어졌다고 한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보는 아니었겠지. 그러면 직접 심을 수밖에. 목포에는 무화과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정원뿐만 아니라 가게 앞에 내놓은 화분에도 많이 심겨 있다. 시골 텃밭의 감나무와 토마토만큼이나 흔하다. 시골집이 있는 정읍에서 무화과나무 귀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면 냉해를 입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 때문에 중부 지역에서도 열매가 열린다. 결정적으로 작년에 어머니가 이웃집 텃밭의 무화과 몇 개를 따 드셨는데, 참 맛있었단다.   


지난 3월 말, 시골집에 여러 나무를 심었다. 무화과나무는 세 그루다.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화분에 심어서 비닐하우스에 뒀다. 고추 모종을 키우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오가며 관심을 두면 잘 자랄 것 같았다. 그 이후 시골집에 전화 거는 횟수가 잦아졌다. 4월이 가고, 5월이 오면서 더 그랬다. 마지막에는 꼭 안부를 물었다. 무화과는 잘 자라고 있냐고.


4월 중순부터 사과나무와 앵두나무에 꽃이 피었다. 자두나무와 살구나무, 보리수나무 싹을 틔웠다. 그때까지 내가 바라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을 잘 주고 있으니 신경쓰지 말랬다. 4월 말이 되자 드디어 무화과도 푸른 싹을 내밀었다. 딱 한 그루였다. 어머니는 며칠 전, 날이 더워서 열과 피해를 본 것 같다고 했다. 옥수수 모종도 많이 죽었다면서. 얼려 죽일 걸 걱정하다가 태워 죽인 꼴이 됐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한 그루면 살짝 불안하기 때문이다. 토요일(5월 4일)에 어버이날을 맞아 시골집에 가기로 했다. 묘목을 파는 데부터 알아봤다. 당근(중고 거래 앱)을 찾아보니, 삽목(꺽꽂이)해서 판다고 했다. 가격도 싸다. 아무 때나 오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금요일에 사무실 직원을 꼬드겼다. 흔쾌히 그러잔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영암 삼호로 갔다. 온실 시설을 갖춘 농가였다. 녹색 무화과 줄기가 손바닥보다 크게 자란 게 전문가는 역시 다르다. 홍 무화과를 닮은 인상 좋은 사모님은 무화과를 키우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게다가 한 그루씩은 공짜로 주겠다고 했다. 나와 직원은 사모님에게 만 원짜리 두 장씩을 내밀었다. 알아서 담아주라고 했다. 종이 상자를 가져와 청 무화과(3천 원)와 홍 무화과 (2천 원) 묘목을 가득 채웠다. 나중에 세어 보니 열한 그루다. 열매가 열리기도 전에 수지맞은 기분이다.


작지만, 강하게 생기고, 잎이 여러 장 달린 한 그루는 사무실에서 키우기로 했다. 무화과나무는 여러 장점이 있다. 다른 유실수와 달리 병충해에 강하다. 나무에서 해충이 싫어하는 액이 나와서 그렇다고 한다. 키우기도 쉽다. 햇볕이 드는 두고, 물만 종종 주면 된다. 내 자리는 무화과 재배로 유명한 영암의 영산강이 보이고, 아침부터 커튼을 쳐야 할 정도로 양지바르다. 6층인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다른 조건이 너무 좋다.


먼저 분리 수거장에 버린 화분부터 챙다. 나무를 옮겨 심고 물을 흠뻑 주었다. 직원들이 예쁘다며 한마디씩 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흥이 난다. 직원들에게 열매가 열리면 하나씩 맛 보여 주겠다고 넉살을 부렸다. 벌써 어떤 맛일지 기다려진다. 직원들의 표정도 함께 말이다. 안 되면 인심 좋은 아주머니에게 한 상자 부탁하면 될 일이다.


묘목을 하루 동안 차 안에 두었더니, 무화과 향이 향긋하게 배었다. 이제 갓 나온 잎에서도 열매에서 나는 향이 난다는 게 신비로웠다. 아버지는 콩과 고구마를 심으려고 텃밭을 잘 갈아 놓다. 햇볕이 잘 들고, 외풍 없을 만한 고랑을 골라 열 그루를 차례로 심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오냐며 탐탁지 않아 하던 아버지도 잎이 잘 오른 나무를 보더니, 올가을에는 열매를 시장에 내다 팔아야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사실, 반은 죽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산 거다. 두세 그루만 살아도, 부모님은 풍족하게 드실 수 있다. 정성만 들이면, 아낌 없이 내어주는 게 무화과다. 가끔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목포에 사는 아들이 심어 놓은 거라며, 자랑하면서 열매를 내어주겠지. 아침마다 무화과가 열렸는지 나무 순을 일일히 살펴봐야 하니 운동도 하고. 잘 익은 열매를 수확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덤이다.


아침부터 내리던 보슬비 점점 굵어졌다. 대지를 적시기에 충분했다. 무화과나무가 고향인 영암을 떠나 내 고향 정읍에서 자라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자주 그곳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가꾸는 데 빠지는 이유인가 보다. 한 달에 한 번은 시골집에 가 보고싶다. 전화도 예전보다 자주 드리겠지. 먼저 부모님 안부를 묻고, 무화과나무 잘 자라는지 살며 떠 보겠지. 무화과나무 덕분에 당분간 효자가 될 듯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 서늘한 바람이 불면, 땅의 기운과 태양의 열기를 머금은 무화과가 열릴 것이다. 사무실에서도, 시골집에서도. 그래서 무화과는 기다림이다.

사무실과 텃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사무실 화단에 열리던 무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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