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목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열이 오르고 기침도 심했다. 목구멍에 가래가 붙어 있는 듯한 이물감도 느껴졌다.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의사는 증세를 묻더니, 입을 벌려 보라고 했다. 목 안이 살짝 부었다고 했다. 하지만, 목 안이 불편한 건 역류성 식도염 때문일 거라고 했다. 의사는 감기약을 처방해 줬다. 약이 다 떨어질 무렵 의사 말대로 감기만 나았다.
며칠 지나서 그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증세의 원인은 짐작했다. 약도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거의 반년 가까이 속을 쓰리게 하는 주식회사의 약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치료제 분야에서는 점유율 국내 1위다. 주가가 오를 것 같다가 처박기를 반복하고 있다. 나는 의사에게 그 약으로 처방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역시나 의사도 그 약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 약도 참 좋지요."
주주로서 회사 이익에 이바지한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다. 나는 처방전을 약사에게 주었다. 약사는 복용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처방 약이 적힌 약 봉투의 처방 약을 세심히 살폈다. 내가 요구한 게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약도 참 좋지요."라는 말은 "내가 처방한 약도 좋으니 그냥 드세요."라는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러니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그날 이후 내 생활 습관에 큰 변화가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 거의 30년 가까이 즐겨 마셨던 커피를 끊었다. 사실, 그날 의사가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말했을 때 올 게 왔다 싶었다. 아내에게 커피를 너무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신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헛트림도 자주 나왔던 것 같다. 아내 말대로 나는 커피 중독자였다.
주말이면 아내와 스타벅스에 종종 들렀다. 문을 열었을 때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 향과 잔잔한 음악이 좋았다. 커피를 주문하면서부터 아내와 다툼이 시작된다. 아내는 여기 커피는 카페인 함량이 높으니 '톨(가장 작은 용량)'만 마셔도 된다고 한다. 나는 무조건 용량을 한 단계 높여서 '그란데(중간 단계 용량)'를 시킨다. 그래야 조금 마신 것 같다. 한 모금 들이켜면 진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두세 모금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활력이 돈다. 다 마실 때쯤이면 심장이 울렁댄다. 그것조차 스타벅스 커피의 매력 같았다.
나는 아침을 조금이라고 챙겨 먹는다. 커피를 마시려면 속이 조금 든든해야 한다는 게 이유다. 회사에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고, 텀블러를 들고 옆 사무실에 간다. 김 주사님은 가장 먼저 출근해서 직원들을 위해 스타벅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문서나 뉴스를 살펴보면서 커피를 마신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피곤함도 사라진다. 칼디와 커피에 얽힌 일화처럼 난 그곳의 염소가 되는 것 같다. 칼디는 에티오피아고원에서 염소를 치던 목동이다. 하루는 염소를 돌보던 중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염소들이 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열매만 먹으면 평소보다 활발히 뛰어다니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생긴 칼디는 자신도 이 열매를 맛보았고, 정신적 각성과 함께 기분이 밝아지면서 활력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초원에서 붉은 열매를 씹어 먹는 염소를 상상하곤 한다.
아침에 타온 커피를 다 마시면 입안이 텁텁해진다. 그러면 인스턴트 디카페인 커피를 두 봉지 타서 마신다. 디카페인 커피에는 카페인이 적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내 확신 때문이다. 게다가 기분이 좋거나 단 게 당기면 커피믹스를 타 마신다. 그래도 오후 두 시 넘어서는 커피를 안 마신다. 오후 늦게 커피를 입에 댔다가 뜬 눈으로 날을 샌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커피는 내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의사 말대로, 역류성 식도염은 커피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증세를 악화시켰다. 그날 이후 결단을 내렸다. 커피를 줄이기로 했다. 처음 보름 정도는 아내가 마시는 커피를 한 모금만 마시기도 했고, 디카페인 인스턴트커피를 종이컵에 타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약을 2주일이나 먹었지만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물었더니, 역류성 식도염은 내과에 가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했다. 내과 의사는 역류성 식도염이 있는지 보려면 내시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커피를 조금이라도 입에 대면 역류성 식도염은 영원히 낫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내가 원하는 약을 말했다. 그리고 그 약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오늘로써 다시 2주일이 지났다.
나는 커피를 완전히 끊었다. 카페인을 끊어서인지, 약의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에 이물감이 느껴지던 것은 훨씬 나아졌다. 커피를 끊으면서 생각하지 않았던 행복을 얻게 됐다. 수면의 질이 확연하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저녁 열 시쯤 되면 졸음이 몰려온다. 그전에는 자면서 여러 번 깨고, 깊숙하게 자지도 못했다. 이제는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일어난다. 밤새 잘 자니 아침을 커피 없이도 상쾌하게 맞을 수 있게 됐다. 내 불면증의 원인은 카페인이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봄비가 내렸다. 이런 날이면 커피가 몹시 그리워진다. 하지만 다시 마시고 싶지는 않다. 커피와의 이별은 쉽지 않았지만, 얻은 것이 많다. 생활 습관을 조금 바꾼 것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음 주면 위와 대장 내시경을 해야 한다. 50살에 가까워지면서 건강검진 결과를 듣는 게 두려워진다. 커피도 끊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제 제약회사 주식만 오르면 된다. 그러면 속이 더 편안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