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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호 Jan 01. 2025

리더의 필수 덕목 "토론"

우물에 갇힌 대통령

12월 3일, 오후 10시 30분이 넘은 늦은 시각, 설거지를 하려고 개수대 앞에 섰다.

내 설거지 친구는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거치대에 세워 놓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설거지가 덜 괴롭다.

여느 때처럼 내 설거지 친구를 불러낸다.

카카오톡 노란 로고에 붙은 여러 개의 숫자. 이끌리듯 터치하고 들어가니 대학 동아리 단체 톡방에 '비상계엄'이라는 자다 봉창 두드리는 네 글자가 오고 가고 있다.


'설거지 친구!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잠옷차림도 아닌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서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연신 봉창을 두드리고 있다. 국회 앞에 포진한 군인들의 모습과 국회 담을 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 자다 봉창은 설마가 아닌 현실이었다.

개수대 앞에 서서 나는 2024년의 비상계엄을 맞이했다.

안전문자는 오지도 않았는데 '외앵~' 하는 실체 없는 비상벨이 귓가에 요란스레 울리는듯하다.


다큐에서, 영화에서, 역사책 속에서 이제는 박제된 글자라 믿었던 '비상계엄'이 급작스럽게 튀어나왔다. 스마트폰의 작은 네모 안에서 보여지는 비상계엄의 비현실적 풍경에 그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뭔가 뒤죽박죽 뒤엉켜버린 것만 같은 일상을 이어간다.

12월, 나의 일상에 예능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뉴스를 틀어놓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탄핵안이 두 번째로 상정되고 가결이 되던 날엔 온 가족이 여의도 집회에 다녀왔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은 거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를 배웠다.


쏟아지는 뉴스를 다 보기에도 벅찬 날들을 지나며 평범하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상기한다.

바로

토론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기에 대의 민주사회에서 시민을 대신할 정치인을 뽑을 땐 반드시 후보자가 토론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토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혹은 토론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갇혔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상자 안에 들어앉아 나와 다른 목소리를 배척하는 한편 내가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에 한정한 확증편향에 잠식된다. 내 의견을 증명하기보단 자기변명에 급급하게 된다. 나무 한 그루 보다 숲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하는 리더의 자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사람을 리더로 추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품은 확신에 대한 어떠한 검증도 할 수 없다. 자신만의 허상이 세상과 동떨어진 우물 속에서 거대한 왕국을 이룬다.


나는 아이들에게 토의와 토론을 가르칠 때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토의와 토론의 가장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되는 형식에 관한 것이다.  

- 자신의 의견을 말한 뒤, 타당하고 신뢰할만한 까닭과 사실에 부합하는 근거를 덧붙여야 한다


둘째, 토의와 토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것이다.

-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의견에 대한 까닭과 근거를 준비하는 과정은 내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증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스스로를 검증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함께 공부하는 초등 친구들도 주장을 말하고 '오잉?' 놀라는 일이 왕왕 있다. 망설임 없이 고른 찬성/반대 의견에 이렇다 할 까닭을 대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 경험을 통해 요즘 초딩들의 표현으로 스스로 '억까'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견을 바꾸기도 한다.

까닭과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은 내 주장이 단단한 논리 위에 놓여 있는지, 혹은 별로 튼튼하지 못한 엉성한 논리 위에 겨우 걸쳐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뒷받침해줄 어떤 토대도 없이 허공 위에 동동 떠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윤은 토론의 경험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일상 토론의 경험조차 없어 보인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아버지에게 고무 호스로 맞았다는 일화를 이야기한 것으로 안다.

아버지께서 아들 이야기를 듣고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혼내주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그랬다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상계엄을 쉽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대선 토론, 기자회견, 대국민 담화, 국경일의 연설, 그리고 비상계엄 선포를 보았다.

주제와 맞지 않는 내용, 일방적인 말들, 질문의 의도와 관계없는 대답, 사실임이 확인되지 않은 근거 제시, 듣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어투가 한결같다.


조선시대 왕 중 최고의 성군으로 히는 세종대왕은 경연을 통해  수도 없이 신하들과 토론하고 학문을 넘어 현실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왕이 신하들과 논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민주적 토론의 모습은 왕정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토론은 조선 전기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당대에 정치와 경제, 과학,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틀림없이 토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국회 상임위원회의 회의를 자주 시청한다.

상임위 회의에서 내가 사는 지역구의 의원을 보게 되면 그가 어떤 의견을 말하고 어떤 까닭을 들며  어떤 근거들을 제시하는지, 어떠한 태도와 말씨로 이야기하는지 집중하게 된다.

또 처음 보는 국회의원이 회의에서 아주 예리하게 논리적으로 핵심을 찌르며 질문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기도 한다. 돌아온 거짓 대답에 대해 이미 철저하게 준비해 놓은 명확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모습은 감탄을 넘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아. 기억해 놓아야지. 저 국회의원의 이름 세 글자!' 

   

반면, 억지 주장과 무논리로 궤변을 늘어놓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밤고구마 백 개 이상의 갑갑증이 느껴진다.

가슴엔 천불이 인다. 

이번 비상계엄 사건을 계기로 나 이외에도 많은 국민들이 상임위원회 회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다음 총선에서 재선 할만한 자질을 갖춘 의원인가를 판단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립과 갈등은 토론을 통해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좋은 리더는 제 뜻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 삼고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다시금 소명 의식을 가져본다. 아이들이 토론을 이해하고 토론할 줄 아는 민주시민으로 자라 그중에서 좋은 리더도 나오고, 일상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현명한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좋은 리더를 알아보는 안목도 갖출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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