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G[오매! 갓이시여!] 시리즈 #04
나와 친구가 함께 교회를 가기로 약속한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눈을 부비고 일어나며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황금 같은 일요일 아침, 공부를 하는 생산적인 활동이나 친구와 노는 즐거운 놀이가 아니라, 친구를 빼앗아가는 교회를 염탐하러 일찍 일어나야 한다니. 하지만 오늘의 고단함이 있어야 앞으로의 주말이 평탄해질 것이다. 나의 목적은 명확했다. 친구를 사이비에서 구출하자! 가 아니다. 친구가 주말에 교회를 나가지 않고 나랑 놀게 하자! 였다.
그 교회에는 지정된 복장이 있었다. 나는 옷장에서 흰색 셔츠와 검정색 바지를 꺼내어입었다. 버스에 올라 낯선 길을 지나 낯선 교회 앞에 내렸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흰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입는 종교적인 이유를 듣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비슷한 옷차림을 갖춰 입도록 하는 요구의 숨겨진 목적은 대개 같다. 집단에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 회사 워크숍을 가면 회사 로고가 박힌 후드티를 입는 이유도 똑같다. 소속감과 유대감이 강해질수록 집단에의 충성도도 올라간다. 이 충성도는 단체들을 지탱하는 핵심요소가 되고, 종교 단체에서는 특히 그렇다. 가끔은 신앙보다도 집단에의 충성도가 종교단체에서 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가 사람들의 여러 욕구 중 생존과 더 긴밀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존이 절박할수록 신보다는 소속감을 위해 종교를 찾고 단체에 충성하기 쉽다.
나는 그들의 소속감에의 몸부림을 내심 비웃으면서도 같은 옷차림을 한 나 또한 이미 집단에 휘말렸나 싶어 불안했다. 미디어에서 사이비의 온갖 만행들을 접해온 터라, 염탐하러 온 내 의도가 들켜 갑자기 낯선 곳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 찬 눈빛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패기 넘치게 동행을 외쳤지만, 사실 고등학생이었던 나 역시 체력이나 처세술이 다른 이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 어떤 곤경도 잘 헤쳐나갈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만치서 친구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흰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를 입은 친구를 보며 우정룩이라고 기뻐할 순 없었다. 오늘따라 친구 얼굴이 평소보다 못나 보였다.
"왔냐?"
"어? 왜 나쁘게 말해?"
"그럼 좋게 말하게 생겼냐?"
친구는 입을 비죽였다. 꼭 주말에 같이 못 논다는 소식을 들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입장이 전도되었다. 전도? 전도라니. 어쩌면 나는 친구에게 은근히 전도당한 것일까? 친구는 엄마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끌려가는 가련한 신세를 연기하며 나를 교회로 꼬드긴 것일까? 거지 같게도, 전도를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는 집단에 오니 친구마저도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이 곳은 자체로 지옥 같았다. 나는 모든 면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매기며 친구와 함께 교회로 들어섰다. 교회 광장은 수 십명의 사람들로 가득했고, 예배할 수 있는 방들도 여럿이었다. 각 방은 50명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1층 뿐만 아니라 2층도 있었다. 2층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전도한 수에 따라 부여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별별 추측을 하며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고, 친구는 그런 내가 웃긴 듯 했다. 친구의 웃음을 몇 번 더 마주한 후 나는 크게 화를 터뜨릴 뻔 했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 프로젝트빔이 쏘여진 화면에서 목회자가 나와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리고 친구를 따라 엉거주춤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반적인 교회와 달리 여기서는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와 예배를 드렸다.
화면 속 설교자는 성경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별 관심이 없어 마음 깊이 동하지 않는 이야기가 유창한 언변으로 터져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는 자세로, 혹은 무언가를 메모하면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 일요일 아침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들의 열성은 이미 확인되었다. 나는 친구를 돌아봤다. 친구는 별로 열심히 듣고 있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친구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평소 듣고 있던 설교의 수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수준이 내게도 설득력 있었는지 궁금했을까? 아니면 혼자 들었을 때랑 달리 그 어설픔이 의식되어 민망했을까? 여하튼 친구를 바라볼때마다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기나긴 설교와 포근한 방석, 긴장으로 인한 피로, 그리고 일요일 아침. 어느샌가부터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참을 졸고 깨며 설교의 타당성을 파악하려는 나를 친구가 툭툭 쳤다. 이제 끝났어, 나가자. 우리는 뻘쭘하게 교회를 나섰다. 설교가 끝난 광장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설교 내용을 공부하거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니 세간에서 '사이비'라고 부르는 집단에 대한 인식이 다소 흔들렸다. 멀쩡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내 친구만 봐도 인성도 좋고 나름 상식적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쩌면 여기에 나름의 타당성이나 옳은 진리가 있는 걸까? 어쩌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그들을 사이비라고 매도하는 건, 그 옛날 초기 기독교가 이단으로 박해당한 이유와 똑같을까? 별별 의혹들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친구의 교회 출입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교회를 나서자마자 언성을 높이며 친구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상해. 나와."
"왜..."
"내가 말했잖아. 나도 판단한다고. 그런데 이상해. 무릎 꿇고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게 또라이 같다고."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내 말에서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였는지, 혹은 자신을 위해(?) 인식이 좋지 않은 교회까지 따라나온 나의 우정이 교회보다 가치있다고 생각했는지, 한참 침묵하다가 교회를 나가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되려 내가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 이성적이고 순한 사람이 잠깐이라도 다녔던 종교가 정말 완전히 틀린 곳일 수 있을까? 여기서는 교주를 재림예수로 간주한다는데, 사실 예수님이 실제로 지구 위를 걸어다녔던 2000년 전,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게 이상하다'는 나의 이유를 똑같이 들이대면,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대중들 중 한 명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내가 아니라 친구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 종교를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나는 친구랑 노는 시간에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입시생이었고, 교회로부터 친구를 빼앗아 보내는 즐거운 주말이 더 중요했다.
그럼에도 그 날 이후 문득문득 올라오는 의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친구, 중학생 때와 달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친구에게 이번 사건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친구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데에 간 거야! 거기는 정말 위험한 곳이야. 우리 교회에서도 거기에 넘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 친구도 빨리 나오라고 해. 당장 안 나간다고 해도, 거기서는 사람들 못 나가게 하려고 엄청 괴롭힌대!' 격렬하고 단호하게 터져나오는 부정적인 반응. 이 반응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그 교회에 대해 갖는 일반적 인식이었다. 나 역시 이걸 확인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독실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 친구에게 이번 일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소중한 두 친구의 이토록 다른 반응이라니. 만약 둘 중 하나가 맞고 다른 한 명이 틀리다면, 나는 이 친구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당장 누군가를 선택하기에는 두 친구 모두 내게 성실한 우정을 보여주었다. 한 종교를 믿기보단 두 친구가 보여준 우정을 믿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두 친구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그들에게 교회나 종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과 관련해 종교적인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와 관련된 문제는 없었으므로 당시 나는 어떤 종교가 더 맞을지 판단하기를 멈추고 더이상 그 문제에 대해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관련되지 않은 이상 종교가 내 삶에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종교학과에 진입하고 종교적인 경험들을 했다는 사실이 어이 없게 느껴질 때는 있지만, 덕분에 고등학생 때의 상황에 대해 명쾌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종교'와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무조건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믿는 종교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면, 나는 내가 비판하는 사고방식(종교에 대한 맹신과 맹목)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고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보다 '종교'를 우위에 두고 판단하는 것이므로. 그렇다고 모든 종교에 한없이 관용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후의 여러 사건을 통해, 나 역시 엄마의 강요 때문에 교회에 나간 친구보다 현명하지는 않고, 무수한 전도 공세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전도의 측면에는 분명히 맹신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니 종교로 미루어 그 사람을 판단하지는 말되, 그렇다고 우정이나 관용을 외치며 종교에 함부로 말려들지도 말자. 어떤 관계를 위해서라도 나의 중심을 잡는 힘은 필요하고, 나의 경우 그 힘은 심리와 종교에 대한 철저한 사색과 성찰, 그리고 경험이었다.
'종교'와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무조건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