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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화 Aug 30. 2023

씨앗을 뿌렸으니
이제 꽃 필 일만 남았네!

[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14 마지막

해와 씨앗


 지금까지 출판 일지를 쓰면서 매화 첨부한 이미지를 찾는 것은 다소 귀찮은 수집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연상되는 이미지를 찾는 작업이 그림책 작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 어울리는 삽화를 구상하고 그려내는 작업'과 '일기와 어울리는 사진을 찾아내는 작업'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출판 일지가 그림책 너머의 그림책으로 다가왔다.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 일명 메타이야기. 혹은 이야기-이상(以上). 그냥 말장난이다. 그저 이번화를 위해 찾은 이 사진, 민들레홀씨 너머로 황금빛 해가 빛나는 이 사진이 황홀할 정도로 찬란한 시선이라서, 그리고 오늘의 일기에 너무나 잘 어울려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진은 마치 지금의 내 가슴 같다. 해가 떠오르고 씨앗이 뿌려지고. 그림책이 떠오른 사건은 해가 떠오르는 듯 강렬한 영감으로 반짝였고, 그림책을 출판하기 위해 달려왔던 시간들은 여러 경험과 함께 내 안에 지혜를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 독자님들에게 그림책이 읽힐 시기는 내 안에서 반짝이던 해와 심어졌던 씨앗을 함께 나누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 시기들이 충분히 여물고 나면 여기저기서 꽃이 필지도 모른다.








 마지막 출판일지이다. 그림책 출판 이후에도 끝마쳐야 할 활동이야 산더미지만, 일단 국내에서의 '출판'이라는 큰 산을 하나 넘었으므로 [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의 출판일지]도 마무리지어야 할 때가 왔다. 처음 <해를 쫓는 아이들>을 구상했을 때부터 여기에 이르는 3년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과 별별 사건들이 있었는지 새삼 감회가 새롭다. 




 지금 내 정신은 처음 이 이야기를 떠올렸던 19년도 여름으로 돌아가본다. 부모님의 밭, 그 날 코 끝을 스치던 후덥지근한 공기, 손에 와닿던, 거침과 부드러움을 함께 머금고 있던 흙의 감촉, 밭 가는 소리, 그 단순한 즐거움, 그것 외의 복잡한 별별거리들은 전부 세상 어느 번잡한 곳에 버리고 온 양 한없이 평화롭던 날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가꾼 하나의 작은 세계에서 온전히 보호 받고 있었고, 돈이니 생계니 인간관계니 하는 번잡스러운 것들로부터 한시적으로 물러나있었다. 세상은 마치 어린시절 그러했듯 평화로웠고 호기심 넘치도록 미지에 쌓여있었으며, 그 미지만큼 상상의 배경은 자유롭고 희고 넓었다. 내 가슴은 동화책을 구상할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웠고 신비에 수용적이었다. 그 날. 이야기는 앞으로 그와 함께할 여러 사건들을 암시하며 내 삶의 문을 두드렸다.




 상징들.

 상징들은 한 사람의 앞으로의 삶의 행보에 대한 힌트를 담고 있다. 

 '해를 쫓는 아이들' 속 상징들.

 그 상징은 내 앞으로의 삶의 행보에 대한 힌트를 담고 있다.




 그렇게 믿고 나는 여러가지 신비한 것들, 상징이니 꿈이니 직감이니 하는 것들을 좇아 제주로 향했다. 그리고 기반을 쌓느라 2년이 흘렀다. 집을 구하고, 알바를 뛰고, 극단에 들어가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 중에는 그림작가님도 있었고, 디자이너님도 있었다. 어떤 인연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필연적이다. 운 좋게도 나는 필연들을 꽉 잡았다. 필시 연필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글.

 한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의 앞으로의 삶의 예감을 언뜻 비춰보여준다.




 그림책 하나를 북극성 삼자 온갖 사건들에도 불과하고 내가 꼭 해야 하는 일들과 취해야 할 자세들이 명확해졌다. 작업의 매순간마다 나는 문을 하나씩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두드리지 않으면 설령 그 문이 열려있더라도 넘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간에 나는 문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때로는 수십 번의 망설임을 넘어서 두드려야 했다. 은근히 소심했던 성향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돌파 사이사이 좌절이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사람들과 사건들, 상황들이 있었다. 시간과 인연은 재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기다림의 순간들도 있었다. 받아들여야 할 건 받아들여야 했고, 변화시켜야 할 건 과감히 변화시켜야 했다. 그 둘을 분간하는 데에는 지혜도 소용이 없었다. 오직 절대적인 경험, 절대적인 양의 시행착오만이 그나마 정확한 지침이 되어주었다.




 그림책 작업을 중심으로 삶이 재편된다 함은, 그와 상관 없어 보이는 온갖 사건들도 작업에 필요한 지혜를 품고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나는 나의 경험들 사이에 숨겨진 지혜를 온전히 추출해내야 했고, 그것을 또다시 작업에 끌어다 써야 했다. 가장 어려웠던 지혜는 사람을 대하는 법과 예기치 못한 불행에 대처하는 법이었다. 가령 협업하는 이와 어느 정도의 친밀함과 거리를 가질 것인가, 사랑이 부족하지는 않게, 허나 그 사랑이 간섭이나 참견으로 변하지 않게, 그렇다고 필요한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조심스럽지는 않게. 관계는 나 혼자만 노력해서 될 일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나의 인연들은 나름대로 성숙하고 성실하며 사랑스러웠다.




 협업이 엎어지고, 인연이 내가 원하는 만큼 빨리 찾아들지 못하고, 방해꾼처럼 보이는 사기꾼이 나타나며 좌절과 낙담, 무기력과 분노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가장 도움을 줬던 건 재밌게도 연이 연어들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장애물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그냥 뚫고 지나쳐 가. 너희들이 그것을 장애물로 보지 않으면 너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어. 긴긴 여행 동안 너희들이 헤엄칠 힘을 가장 소중히 아껴야 해. 힘이 마땅히 쓰여야 할 곳에 봉사하도록."




 나는 혼잣말하곤 했다. "연아, 나는 너의 말을 받아적으면서도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23년 8월 29일. 그간 내 속을 가장 썩인 사건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무지개가 뜬 하늘을 날아 서울에서 제주로 돌아오는 날, 나는 이 이야기에 딸려 왔던 곤란들에 가려져 있던 이야기의 감동과 매력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원 모양으로 뜬 무지개처럼 한 번의 주기가 마무리되었다는 직감, 출판일지를 끝맺어도 괜찮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23년 8월 30일.

 19년 여름으로부터 딱 3년이 지난 이 시점에, 출판 일지까지 마무리 짓게 되니 의미가 깊다. 여름을 닮은 이야기는 여름에 태어나 여름에 끝맺어졌다.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이야기를 한 번 즈음은 매듭지어야 한다. 3년 동안 이야기는 나를 이끌어주었고, 시간의 길 위에서 소중한 인연들과 경험들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이 이야기의 덕을 보았고 그 사실에, 그러한 선물을 넘치도록 퍼부어준 영감이나 신비, 인연 등에 두루 감사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 이야기가 가닿을 다른 모든 존재들이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동을 조금이나마 맛보길 바란다.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의 꽃이라면, 그 꽃은 씨앗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 씨앗들이 알음알음 뿌려지길 기대해본다. 그 어느 여름날, 밭 이랑이랑에 씨앗을 뿌리던 누군가를 찾아왔던 이야기가, 한 주기의 꽃을 피워내 이제는 또다른 누군가의 가슴 고랑고랑에 씨앗을 심어주길 바라며,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일지를 마친다.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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