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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희 Dec 27. 2018

말 못하는자에게 죽음을

'말더듬이' 한비자의 사례 참고

요즘은 바야흐로 달변가의 시대이다. TED에서 Youtube까지, 전문가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말잘하는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구글이 흩뿌린 스타트업 조직 문화는 국내 기업들도 하여금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고민하게 하였고 덕분에 과거와 달리 보고서 보다는 PT 잘하고 말 잘하는 순발력 있는 직장인들이 점차 인정받고 있다.


소통능력은 중요하다. 회사는 업무 '효율적인 말'은 Communication을 원할하게 하고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되게 한다.(반대로 Miscommunication은 일을 얼마나 피곤하고 복잡하게 하는지...)


다만, '효율적인 말'과 '화려한 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화려한 말'은 '설득의 기술'일 뿐이다. 사업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내용'이다.


  국내 많은 대기업에서 대대적인 'PPT 사용하지 않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었다. 이는 '설득의 기술'에 '내용'이 흐려지지 않게 하려는 회사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이제 기업들은 더 나아가 '글로 하는 보고'가 아닌 '말로 하는 보고'로 움직이고 있다.


보고서를 꾸미는데 들이는 노력과 비용을 생각해본다면 '말로 하는 보고'로의 변화는 일견 긍정적이다. 그러나 '말'이란 그 속상상 말하는 사람의 언변과 순발력에 내용이 많이 좌우된다. 회사원이라면 실무에 뛰어난 직원이 상사 앞에서의 보고에서 무너지고 경쟁에서 밀려나는 상황들을 이미 많이 목도 했을 것이다.


'말로 하는 보고의 시대'에 경영자는 '말'보다는 '내용'에 좀더 집중해야 한다. '말로 하는 보고'가 될수록 회사에서는 언변과 순발력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점점 더 부각된다.하지만 말 잘하는 사람이 곧 능력있는 사람은 아니다. 회사의 성공은 '말'이 아니라 '내용'에 달려 있다.


하지만 '말 잘하는 사람'이 곧 '능력있는 사람'이 아닐 수 있음에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전국시대 한비자의 일화를 소개 하며 짧은 글을 마친다.




한비자(BC 280경~233)는 전국시대 말기에 약소국인 한(韓)나라 왕실의 서자로 태어났다. 생모가 천출인 탓에 어릴적부터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려 말더듬이가 되었다. (학자들의 추측)  한비자는 조국의 현실에 실망을 느끼고 제나라로 떠나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유학자 순자(성악설, 맹자는 성선설) 밑에서 공부한다. 이때 같이 수학하던 이가 후에 진나라의 승상이 되어 진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이사(BC 280경~208)다.


한비자와는 달리 말재주가 뛰어나고 야심가였던 이사는 일찍이 당시 진나라의 권력자였던 여불위(진시황의 생부)의 식객(식객이 3000명인건 함정)이 된다. 하지만 낭중지추라 하던가, 이사는 뛰어난 변론 능력으로 여불위의 눈에 띄어 진시황제의 시종인 낭관으로 임명된다. 이사는 이후 진시황제 천하 통일전략을 수립하며 '정위'(법을 담당하는 실세 자리)까지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이즈음에 이사에게 위기가 닥친다. 진시황제가 한비자의 저서 [한비자]에 깊은 감명을 받명을 받아 한비자를 진나라로 초빙한 것이다. 진시황제는 책  [한비자]의 내용에 깊이 감탄하여 "죽기전에 한비자를 만날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라고 할정도 였으니 그 사랑을 미루어 짐작할만 하다.


하지만 진시황제의 '한비자 사랑'을 익히 알고 있는 이사는 자신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모략으로 한비자를 자결로 내몬다. 법가 '이론가'였던 한비자가 같은 법가 '실천가'였던 이사에게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백가쟁명의 전국시대에 법가가 법가를 죽인 역사의 아이러니다.

(추측컨데 한비자의 죽음에는 이사의 열등감도 있었을성 싶다. 이사는 자신이 하급관리 출신이었던 반해 비록 서자긴 하나 한나라 왕족출신에다 학문적 성취까지 뛰어난 한비자가 질투났을 거다)


만화 '킹덤' 中


한비자와 진시황제의 만남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진시황제가 한비자의 말더듬에 크게 실망했다고만 전해진다. 다만, 진시황제가 한비자를 그토록 보고싶어 했음에도 그리 쉽게 한비자를 폐기한 것을  보면  한비자가 '말'로 진시황제를 설득하는데 실패한건 확실해 보인다.

(사마천은 한비자의 죽음을 두고 ‘세난(說難; 설득의 어려움)’ 같은 훌륭한 글을 썼으면서도 자신은 결국 설득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한비자와 그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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