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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베 Mar 24. 2019

6개월 백수일 때 한 것들

p.s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내가 약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읽었던 책 중에는 故 김환기 화백의 작품과 그의 아내인 김향안 여사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가 있었다.


보통은 책을 앉은자리에서 읽지는 못하지만 그 책은 앉은자리에서 2시간 만에 완독 했다.

이성적 성격과 거리가 먼 감성적 성향이 높은 나는 영화나 뮤지컬, 연극과 같은 문화적인 요소에서도 로맨스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에 담겨있는 두 부부의 끈끈한 우정과 사랑,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많이 전해준

인문학적 요소가 많았기에 가장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속의 부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서로에게 편지를 썼던 방식과 말투를 잠시 빌려

지난 6개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작성하고 싶다.


이 글을 바치는 이는 내가 한때 아주 많이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TO.

날씨가 꽤 청명해졌습니다.

지난 며칠간은 미세먼지로 탁한 공기를 언제까지 마셔야 되나 걱정했었는데 말이에요.


2019년 3월 중순에 파란 하늘에 감명받고 있다 나는 갑자기 딱 일 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딱 3개월만 쉬자고 다짐했던 백수생활은 조그만 더 놀자, 조금만 더 하더니 어느덧 6개월이 지나갔었습니다.

석 달만 쉬다 보면 노는 것도 지겨울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에 새삼 놀래기도 했고요.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는 것입니다.

2년 전 태국여행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나에게는 그곳이 먹고 놀고 편히 쉬기 딱 좋은 곳이었나 봅니다.


날씨가 더워서 땀을 뻘뻘 흘려도

나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값싸고 실컷 마실 수 있는 그곳의 맥주와 과일을 참 좋아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보통 여행에서 딱히 뭔가를 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 없이 다니고 싶어도 막상 직장을 다니며 이틀, 삼일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정해지면

늘 유명한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야 될 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꽉 잡혀있는

보통의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때는 시간이 흘러넘치는 백수였기 때문인지

이틀간의 시간이 금 같지 않았고 누구의 제한도 받지 않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었습니다.

지인이 발리 여행을 다녀와 선물해준 이 비치타월을 챙겨 오며

바쁜 여행 중에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 미소가 절로 났지요.


그래서 이 날은 파타야 해변에 앉아 한없이 바다만 몇 시간째 바라보았어요.

당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석양은 늘 예쁘지만, 이 날 파타야 해변에 앉아서 보던 석양은 잊지 못할 그림이었습니다. 물론 당신과도 함께 있고 싶었지요.


사람 사는 게 어디서나 다 똑같다는 것을 느낀 것이,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 풍경에 행복해하는 모습들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나는 태국에서 실컷 놀고 돌아온 뒤에도 마음만 먹으면 대낮에 전시회와 카페를 방문했었어요.

'우리들의 20세기'

지인 몇 명이 살고 있는 수원에 놀러 가면 꼭 이 화성행궁 근처에 위치한 카페를 간답니다.

꽤 감수성이 풍부한 나는 이 카페의 한적한 분위기에 취해있었는데,  말없이 귤 2개를 건네주던 사장님의

친절함에 우리들의 20세기는 아직 살아있구나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날도 좋고 볕도 좋으니 산책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당신과 함께 걸었던 지난 산책길을 생각하니 당신이 참 보고 싶습니다.


또 날이 흐린 날엔 흐린 대로 집 앞 텅 빈 카페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다가

앞으로 어떻게 살면 재밌게 살까 머리도 좀 식혀봤습니다.

 


많은 영감을 받은 책,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완독하고 책으로만 작품을 보는 게 아쉬워

이 날은 직접 부암동의 미술관으로 향했었죠.

서울에 살지만 보통은 가던 곳만 가는 편인 나에게 이 동네는 새삼 낯설었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동네더군요.


 






이렇게 오래 쉬는 김에 언제 또 시간이 있을까 싶어

나는 부산-여수-강릉을 순서대로 국내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아직은 혼자 여행이 무서운 나와 함께해주었던

전 직장동료 Y 씨, 13년 지기 친구 K양,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것을 함께할 J군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전 직장동료였던 Y 씨와 함께한 부산 여행은 내 예상처럼 부담되지 않은 깔끔한 여행이었습니다.

Y 씨는 외향적인 성격은 강하나 감수성도 풍부하여 나와 일부분 잘 맞는 사람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녀와 함께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렇게 받고 있는 이 좋은 영향을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 아찔합니다.


그만큼 그녀는 나에게 친한 동료이자 인간으로서 본받을 것이 많은 사람이지요.

광안리 해변을 걸으며 우리는 어김없이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사뭇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도 그녀는 찰떡같이 받아주며 자신의 생각을 더해 좋은 견해를

건네주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한 번은 숙소에서 이 치킨으로 마무리를 하려는데, 거실 한편에 혼자 다이어리를 적고 있는

여성 한 분을 만났습니다. 혼자 여행을 온 그녀는 결혼 준비차 부산을 내려왔다가 잠시 쉬고 있다고 했습니다. 콩 한쪽도 나눠먹는 우리나라 정서에 한 입을 권하면서 새벽까지 수다가 이어지기도 했지요.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이지만 비슷한 고민과 인생을 논하면서 정이 들더라고요.

 

다음날이 되어서 나갈 채비를 했씁니다.

이때에도 아무런 계획을 세워놓지 않았던 우리는 발길이 닿는 대로 버스에 몸을 싣고

바다 한편 동네에 도착했죠.


바람이 얼마나 거세고 추웠던지, 새삼 부산 바람이 낯설고 무서웠습니다.


집어삼킬 듯이 거친 바다의 파도와 조금씩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자연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아주 작은 생물체인 게 맞는가 봅니다.




여수 여행은 내 오랜 13년 지기 친구인 K양과 함께 했습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에 살아서 그런지, 나는 요즘 이런 한적한 곳이 너무 좋습니다.

이게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라면 조금은 아쉽지만 나쁘지는 않습니다.


내 친구 K는 성격이 좀 거칠긴 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 점이 나와도 조금 닮아서 나와 K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둘 중에 하나를 빠르게 택하는 편입니다.

  

K와의 여행에서 조금 놀랬던 것은, K는 평소 계획 없이 즉흥적인 줄만 알았는데

이 날은 꼬깃꼬깃한 종이를 펴서 일정을 빼곡히 적어 놓았었죠.

 

덕분에 좋은 곳과 좋은 풍경을 닮을 수 있어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천만.

갈댓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오랜만에 십여 년 전에 있었던 학교 생활과 같은 반 친구들, 그때에 느꼈던 큰 고민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깔깔댔습니다.






강릉 여행은 늘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J군과 함께 했었습니다.

J군은 이 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어쩔 때는 에너지가 너무 넘쳐흘러 조금 나를 지치게 할 때도 있지만, 은근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의 모습을 볼 때면 변하는 내 모습이 다소 신기하기도 하네요.


특히 일출을 보는 것을 참 좋아하는 J는 아침잠이 많은 나를 설득한 끝에 새벽기차를 타고 향했습니다.

설레 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면서 일출이 뭐가 다르냐며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나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정동진에서 보았던 일출은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자 황홀까지 했으니까요.


이때 찍었던 사진은 그 어느 하나 색을 입히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를 담았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분홍빛과 주황빛은 수평선 넘어 저 멀리 바다의 모습까지도 감돌아 버렸어요.




당신도 이 풍경을 함께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직 세상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신이 참 그립습니다.

물론 당신은 본인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는

최고의 엄마이자 할머니였습니다.


손녀와 할머니라는 우리의 관계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말하자면 '끝'이 났지만,

우리 둘 다 저 우주 속 어느 별이 된다면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할머니,   


이 세상엔 왜 이렇게 갈 곳이 많고 볼 것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난 여행과 6개월 동안의 백수라는 생활을 하면서 크게 느낀 한 가지가 있습니다.

평소에 관심 있었던 분야에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이것저것 찾아도 보고 지인을 찾아가 여러 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쉬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찌감치 느꼈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차근차근 작은 것부터

시작한 뒤 기회를 만들고 그것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씁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퇴사를 고민했다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부족한지 몰랐을 거예요. 직접 겪어보고 경험해보니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할머니처럼 최선을 다해서 이 거친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려고 합니다.

지금도 내 곁 어딘가에서 늘 지켜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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