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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19. 2020

흑백과 컬러 사이의 변화 가능성

특별한 색감의 경험을 주는 영화가 있어서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플레전트빌>입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원제는 <Pleasantville>입니다. 직역하면 '유쾌한 마을' 정도가 되겠네요. 이 제목이 말하는 'Pleasantville'이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흑백 시트콤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남매인 데이빗과 제니퍼가 리모콘을 가지고 싸우다가 TV수리공이 준 이상한 리모콘으로 인해서 이 흑백 시트콤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기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흑백 시트콤은 'Pleasantville'이라는 이름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트콤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준수한 외모에 차분하고 상냥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행복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신이 보우하는 듯이 모든 축복이 함께하며, 모든 재앙에서 자유롭습니다. 예를 들어 이 마을의 농구팀은 코트 반대편에서 공을 던져도 링에 골인하며, 절대 화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소방관들의 주요 업무는 고양이를 구하러 다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정해진 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이 마을은 마치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 같습니다. 사람들간의 갈등도 없고, 많은 콘텐츠에서 생기는 애정문제로 인한 질투도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해져 있는 단 한 사람에게만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 감정은 성관계까지 발전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지적 교육수준은 낮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서관에는 겉표지만 번드르할뿐이고 내용은 백지입니다. 고등학교로 생각되는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입니다. 

이러한 마을에 데이빗과 제니퍼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특히 초반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제니퍼입니다. 찌질한 성격에 프레전트빌 팬인 데이빗은 자신이 프레전트빌의 등장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즐기며 역할에 몰입하려 합니다. 하지만 데이빗과 반대로 날라리에 과도하게 개방적인 성관념을 가지고 있는 제니퍼는 이러한 마을의 분위기에 대해서 질색해합니다. 제니퍼는 본인이 연기하고 있는 메리 수라는 캐릭터에게 고백한 스킵이라는 남자와 데이트 중 성관계를 가집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트콤은 어린애를 위한 동화 같은 세상이라서 당연히 성관계는 스킵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처음 접하는 관념입니다. 이 관념을 접한 스킵은 더이상 흑백의 색상이 아니라 다양한 색상의 색깔을 가지게 됩니다. 이 색상을 가지면서 스킵은 프레전트빌 사람들이 으레 누리고 살았던 축복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이제 농구에서 골을 넣기 위해서는 공이 링에 맞아 튕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스킵과 제니퍼는 성관계라는 개념을 주변에 퍼트립니다. 이 관념에 노출된 사람들과 주변은 점차 흑백에서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합니다. 


제니퍼에서 데이빗으로 서사의 중심이 넘어갈 때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아주 재밌습니다. 제니퍼가 퍼트린 성관계는 제니퍼 또래의 학생들에게 유행처럼 번집니다. 데이빗과 제니퍼가 연기하고 있는 버드와 메리 수의 엄마인 베티가 제니퍼에게 학생들의 변화에 대해서 묻습니다. 제니퍼는 베티에게 성관계와 함께 자위라는 관념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베티가 자위를 하는 그 순간, 화단의 나무에 불이 붙습니다. 집에 있던 데이빗은 소방서로 얼른 뛰어가 소방차를 어떻게든 끌고오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이제까지 화재가 없었기 때문에 소방관들이 불을 끌 줄 모릅니다. 결국 데이빗이 소방도구를 이용하여 불을 끕니다. 이 일로 데이빗은 훈장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데이빗은 찌질이에서 주목받는 인싸가 됩니다. 그리고 마거릿에게 수제 쿠키를 받으며 관심을 받습니다. 본래 프레젠트빌 시트콤에서 이 쿠키는 와이티가 받아야 할 쿠키였습니다. 데이빗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쿠키를 받으면서 데이빗은 본인이 연기하고 있는 버드라는 캐릭터가 아닌 '프레전트빌의 데이빗'이 됩니다. 이야기 중에서 제니퍼가 빈껍데기 책의 내용을 생각해냈더니 생각해낸 만큼 내용이 생기더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니퍼는 그 책의 결말을 모릅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책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주변의 호응에 따라 데이빗은 책의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뒷부분이 떠올라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후의 전개를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프레전트빌에 시작된 변화는 제니퍼가 시작했지만, 데이빗이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제니퍼의 원동력이 짜증과 성욕이었다면 데이빗의 원동력은 마거릿과 인싸력입니다. 이후 데이빗은 프레전트빌의 색채 작업을 계속해나갑니다. 

데이빗과 마거릿. 데이빗으로 인해 마거릿은 채색되지만 데이빗은 이후로도 한참 뒤까지 흑백입니다. 사진 출처 : 다음영화


이렇게 보면 흑백에서 다양한 색깔로의 변화가 성적 원인으로 생기는 현상일거라고 짐작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적 요인은 단지 변화의 한 가지 원인일 뿐입니다. 만약 성적 원인으로 인해 생기는 변화라면 가장 먼저 제니퍼가 변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니퍼와 데이빗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변화가 생깁니다. 제니퍼의 변화는 제니퍼가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생깁니다. 데이빗은 베티를 둘러싼 불량배들 앞에 맞설 때 변화합니다. 즉, 날라리에 탕아였던 제니퍼는 본인이 연기하는 메리 수와 비슷한 캐릭터가 됩니다. 반면에 찌질한 아싸였던 데이빗은 프레전트빌의 변화를 주도해가는 인물이 되지요. 

이런 인물의 변화 때문에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많이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보다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프레전트빌에 넘어가기 전 데이빗과 제니퍼처럼 찌질한 아싸와 방탕한 날라리의 삶이 프레전트빌에서 변화한 이후의 삶보다 못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변화했고, 다른 형태의 삶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입니다. 프레전트빌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의 삶이 가치없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정해져있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배우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니퍼와 데이빗이 등장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이 가능성은 사실 누구나 내부에 가지고 있는 가능성입니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니까요.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흑백의 색에서 다양한 색으로 변화합니다. 마지막까지 변치않던 시장은 자신 안에 있는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흑백에서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합니다. '유쾌한 마을'의 시장이 그 안에 분노를 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 가능성이 최대로 발휘되면서 프레전트빌은 흑백이 아닌 다채로운 색깔로 채색된 공간이 됩니다. 즉, 대본이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에서 텔레비전 밖과 같은 또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제니퍼는 플레전트빌 세계에 남습니다. 텔레비전 밖의 세계에 삶이 있듯이 플레전트빌 안의 세계 또한 주체로서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빗은 플레전트빌 밖으로 나오면서 제니퍼에게 다시 만나러 돌아올 것을 기약합니다. 데이빗에게 플레전트빌이 하위차원이 아니라 동위공간으로서의 마치 외국과 같은 만나러 올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변화라는 것을 이끌기 위해 커플들을 이용한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변화는 현재 파트너와는 다른 누군가와의 커플링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데이빗과 연인관계가 되는 마거릿은 원래 와이티와 연인관계였지요. 제니퍼 역시 농구부 주장이 아닌 스킵이라는 인물과 관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베티는 유부녀이므로 밥과의 관계는 불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과는 다른 변화를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서양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불륜의 미화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마치 지금의 연인을 관습, 억압된 일상 등으로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불륜상대를 자유로움이나 진정한 사랑, 열정 등으로 포장하는 클리셰를 볼때마다 짜증이 납니다. 예전에 이런 클리셰의 원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 글을 쓸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채색이 된 베티에게 데이빗이 흑백으로 보이게끔 화장해주는 시퀀스입니다. 비틀린 상식과 인물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시퀀스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영상미가 아주 독특합니다. 흑백과 컬러가 한 화면에 나타나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롭고 아름다운 영상이 됩니다. 또한, 흑백에서 컬러로 변해가는 장면 역시 아름답지요. 그저 흑백과 컬러를 섞어놓았을 뿐인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예쁘게 잘 뽑아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편집하는데 고생 많이 했을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찌질한 연기는 토비 맥과이어가 단연 원탑인 거 같습니다. 영화 시작하고 10분도 안 되어서 데이빗이라는 캐릭터의 찌질함을 머릿속에 때려박습니다.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 연기가 생각나더군요. 생각해보니 개봉년도도 비슷하네요. 멋진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화도 좋지만 이런 캐릭터의 영화도 나름의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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