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가정이 깃든 곳

Family - 그 농밀한 기억 15- 1

by 이관순

모파상은 소설 <여자의 일생>에서 잘못된 만남이 만드는 가정의 비극을 그렸습니다. 지체 높은 귀족의 외동딸로 곱게 자란 잔이지만, 행복해야 할 결혼은 시작부터 악몽의 연속입니다. 남편은 첫날밤에 야수와 같은 모습으로 환멸을 안기더니, 하녀에게 아이를 낳게 하고, 백작 부인과 간통도 서슴지 않습니다. 남편의 야수성은 백작에 의해 살해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잔은 아들에게 남은 기대를 걸지만 아들마저 어미의 기대를 저버리고 방탕하게 살더니 결국 그녀 곁을 떠나버립니다. 가정을 무대로 한 인생의 사무치는 애수와 시정이 짙은 작품입니다.


사람이 사는 집(house)과 가정(home)은 서로 기대며 살아갑니다. ‘사람人’ 자는 사람과 사람이, 집과 가정이 서로가 기대며 깃들고 사는 관계로 형상화했습니다. 집은 가정에 안식처를 제공하는 대신 가정은 집에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되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집이 하드웨어라면, 소프트웨어는 가정입니다. 집과 가정을 쌍태라고 함도 집과 가정을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관계 때문이겠지요.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운 멋진 정치인이 있습니다. 미국 공화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2018년 돌연 은퇴를 선언해 주위를 놀라게 했지요. 정치인으로 살면서도 15년 동안 매 주말마다 워싱턴에서 1300km 떨어진 집을 찾아 가족과 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별사에서 정치 현장을 떠나는 이유를 간결하고 명료하게 밝혔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돌아갈 곳은 가정이고 그때가 지금.”


메이어 영국 총리도 비슷한 말을 남기고 가정으로 향했습니다. 절정의 정치 가도를 달리던 호주의 존 키 총리도 중도에 하차했습니다.

“그동안 가정이 정치에 많은 걸 희생했는데, 이젠 정치가 가정에 희생할 차례임을 알았습니다.”

초연한 은퇴 선언으로 박수를 받았어요. 출발도 가정이고 마지막 귀착지도 가정입니다. 많은 귀거래사 가운데 가정보다 고결한 것은 없습니다.

“집은 곧 모든 것이야. 당신이 있는 곳이 내 보금자리야.”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나온 명대사도 가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집은 사람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구석기의 동굴로 시작해 움집이 생겨나고, 농사를 짓게 되자 불을 지키고 곡식을 쌓아둘 곳이 필요해지면서 갈수록 공간의 필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욕구가 점차 안정된 주거형태로 발전하고 개선되면서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지상 낙원에 이르게 됐지요. 우리말 중에 가정을 뜻하는 ‘보금자리’ 만큼 사람에게 안락함과 평안을 주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 보금자리가 언제부터 ‘부동산’으로 둔갑했습니다. 어젯밤 전철에서 엿들었던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의 다짐도 부동산이었습니다. “절대 지하철 2호선은 벗어나지 말자.” ‘절대’란 결기에서 부동산의 괴력을 느낍니다. 한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라고 쓴 한 아파트 분양광고 카피가 경구처럼 들린 뒤로는 “어디 사세요?”란 질문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정부는 시장이 꿈틀댈 때마다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고, 시민은 그 대책을 좇느라 영일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모두가 ‘집’이라 쓰고 ‘부동산’으로 읽는 우스꽝스러운 광대 세상이 됐습니다. 슬퍼도 울지 못하고 웃어야 하는 광대처럼 말이죠···.

수년 전, 영국의 유수 잡지사가 설문조사를 통해 ‘가정’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가정은 투쟁이 없는 세계요

큰 자가 작은 자가 되는 곳

아버지의 왕국이고

어머니의 세계요

자식들의 낙원인 곳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곳

허물과 실패를 사랑으로

숨겨주는 곳입니다. ❞

하지만 집이 부동산이 된 우리 사회에서

는 보금자리란 말은 허상이 되고 공허할 뿐입니다. 우리 젊은 세대에게 집은 필생의 과업이 돼버렸고, 그 희망의 불씨마저 말랐다는 탄식을 곳곳에서 말아냅니다. 그래서 되묻습니다. 집은 ‘사는 곳(home)’ 인가? ‘사는 것(buying)’ 인가?(*)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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