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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요에게.
"서로 속상한 마음들이 쌓여가겠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 믿고 그냥 묵묵히 우리의 연결로에서 켜져 있는 가로등을 찾아가 보자."
너가 적은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처음에는 '연결로', '가로등'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다시 읽으니 가장 크게 남는 건 '묵묵히'더라.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묵묵하다'는 건 '말없이 잠잠하다'는 뜻이래. 그리고 이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고병권 선생님의 <묵묵>이라는 책이야.
프롤로그 일부를 소개해줄게.
(...) 길은 절망한 사람들에게만 캄캄하다. 숨을 깊이 마시고 정면을 주시하면 어둠은 옅어진다. 천천히 걷다 보면 길이 조금 보이고, 보이는 만큼 걸어가 보면 또 그만큼이 열린다. (...) '묵'이라는 글자는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흑'과 '견'을 합친 글자로, 개가 잠잠히 사람을 따르는 모습에서 나왔다고 한다. '흑'이 발음을, '견'이 뜻을 나타낸다. 그런데 '흑'과 '견' 모두 내게는 소중하다. 무엇 보다 둘이 하나의 글자 '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묵'은 어두운 밤길에 나와 함께 걷는 존재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내 곁에 개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걷고 있음을 일깨워 주웠다. (...)
고병권, 『묵묵』(돌베개, 2018) pp. 7 ~ 9.
막막하고 어려운 길이라도 그저 마주하며 나아간다는 힘을 잔뜩 느낄 수 있는 글이야. 우리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묵묵히 걸어가자. 어떨 때는 차분히 기다리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잔뜩 캄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희미할지언정 꺼지지는 않은 작은 불빛일테니.
2023.05.08.
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