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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죠앙요 May 13. 2023

(58)

    우리에게 약간의 막막하고 묵묵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반짝거리는 등불의 시간이 돌아온 것 같네. 함께 묵묵한 시간을 보내주어 고마워. 오늘은 마침 학교 과제로 쓰고 있는 '나'의 역사를 여기에 기록해 볼까 해.


     


    <'나'의 역사 쓰기>

    

    한 사람의 삶을 구분 짓는 기준은 아주 많겠지만, 시기별 나의 마음가짐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섯 단락으로 나뉜다. 1) 태생~초6, 2) 중1~고3, 3) 20세~23세, 4) 24세~26세, 5) 27세(현재) 정도로 말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저 시기별로 너무나도 달랐고, 그래서 후회스러운 과거도, 만족스러운 선택도 두루 존재한다. 여느 사람의 삶처럼 말이다.




    1. 태생 ~ 초6


    누군들 태어나서 천 일이 될 때까지의 기억을 쉽게 하겠는가. 나 또한 태어나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의 기억이 사실상 없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기억하는 두 가지는, 부드러웠던 어머니와 엄격했던 아버지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궁금증은 끝없이 폭발했는데, 그 궁금증을 다루는 방식이 집안 교육에서 두 방식으로 나뉘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세상 어디든 함께 다니셨고, 덕분에 나는 시장부터 항구까지, 고향 부산의 전역에 발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곤 했다. 초반에는 어머니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저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내가 그녀에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더랬다. 감사하게도 그런 정보를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의 소통은 끝나지 않고, 더 깊숙이, 왜?라는 질문을 서로 던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반면, 엄격했던 아버지는 내게 많은 것을 원하셨다.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셨고, 공부를 잘 따라가지 못하면 새벽까지 앉혀놓고 혼내면서 공부를 시키셨다. 그는 내게 너무 어려운 존재였고, 나의 두 누나들에게도 어려운 존재였다. 아니, 사실상 말을 먼저 걸기 어려운 무서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나와 내 누이들을 가르치는 기준이 있으셨는데, 처음 보는 것은 무조건 보여주거나 사주는 것이었다. 전자기기를 사더라도 최신기기를 사서 최신의 기능을 경험하고, 과자나 라면도 새로운 것이 보이면 꼭 사 오셨다. 술을 거하게 드신 날이면 천냥마트에서 약간은 기괴하고도 신기한 장난감들을 사 오셨고, 그 모든 것은 내게 너무나도 신나는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부모님의 교육 철학이었는지, 세 명을 키우는 집안의 빠듯한 경제사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친구들이 모두들 국영수 학원을 다닐 때 나는 학원에 가지 않았고,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아파트 놀이터에서 땅을 파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모르는 동네를 다녔다.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중, 고등학교


    뺑뺑이로 간 중학교는 부산에서 뒤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공부를 못 하는 남중이었다. 학교는 언덕 위에 있어서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야 했고, 함께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의 성적 격차는 아주 컸다. 학교 주변의 거주 환경도 격차가 매우 컸고, 판잣집부터 부산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비싼 아파트까지 모두 공존했다. 상대적으로 큰 키와 큰 목소리, 그리고 잘 웃는 모습으로 자연스레 친구들의 인기를 얻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는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는지 배워나갔다. 학교의 환경 덕분에 정말 극단적으로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결국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체득해 나갔다. 초등학생 때 타던 자전거의 반경을 더 넓혀, 부산의 끝으로 향했고, 차로도 한참 걸리는 곳들을 처음에는 혼자, 나중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다녔다. 학교에 오는 캠프와 경험 관련 공문은 무조건 신청을 해서 새로운 경험을 쌓는데 진심으로 살았다. 학교 밖에서 봤던 삶들은 나에게 너무 값진 것이었다.


    역시나 뺑뺑이로 간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남고였다. 학교는 산 중턱에 있어서 겨울에도 엉엉 울며 올라야 했고, 함께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비싼 학원이나 고액과외를 중학생 때부터 하던 곳이었다. 중학생 때의 경험을 살려서 이 학교에서 목표를 '졸업할 때 모든 선생님이 나를 알게 하자'로 세웠고, 학교에서 재밌어 보이는 건 뭐든 열심히 했다. 청소를 할 때도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했고, 학교에 카메라를 가져가서 학교 생활을 기록했다(이 기록은 성인이 되어 장편다큐 '입시충'으로 완성되었다). 성적이 중상위 수준이라 부산에서 적당한 대학을 갈 것 같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는 더더욱 내가 잘하는 것을 열심히 했다. 외부로 끊임없이 눈길을 돌렸고, 캠페인과 프로젝트를 했으며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치관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고, 진짜 힘든 게 무엇인지, 굳이 힘들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한때 프랑스로 영화유학을 가려고 불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친누나가 '야자 할 때 먹는 라면'이 존맛탱이라고 해서 결국 한국의 대학을 준비했다. 그리고 정말 야자 때 먹은 떡볶이와 라면은 눈물 나게 맛있었다. 살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편히 상대를 대했던 마지막 시기였던 것 같다.




  3. 20~23세


    정말 운 좋게 가고 싶던 한예종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가 나와 안 맞다는 생각을 곧바로 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조용한 학교, 우울한 사람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든 하루하루. 게다가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꽤 했는데 여전히 나는 하고픈 얘기가 없었다. 그래서 1년 다니고 휴학을 하고 모아둔 돈을 가지고 반년간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유럽-동남아시아를 다니는 여행. 어떻게 보면 학교에서 도망쳐 나온 여행이기도, 더 넓은 세상을 보러 온 여행이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 여행으로 중, 고등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부산 곳곳을 다니던 시야의 폭을 더 넓혔다. 하고 싶은 게 원래 많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많아졌고, 살아가면서 절대 볼 일 없을 것과, 먹을 일 없을 것들을 너무 자연스레 먹게 되었다. 죽을뻔한 적도 몇 번 있고, 디지털 노매드들도 만난 적이 꽤 있는데, 사람은 정해진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반년간 정말 많은 일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다쳤다. 여행하면서 하고 싶었던걸 결국 쉽게는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고, 결국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되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면서 성균관대학교에서 학점교류로 창업을 공부했다. 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나의 일과 삶, 공부를 쌓아나갔고, 내 이름으로 프로덕션을 차렸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과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학교 대표로 많은 곳에 참석했고, 장학금도, 해외연수도 모두 쉽게 쉽게 거머쥐었다.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정말 모든 게 잘 풀렸다. 그리고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냥 살면 되는 건가? 그다음에는 뭐가 있지? 내가 이렇게 100억을 벌면 행복할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소셜벤처 '닥터노아'를 알게 되었다.




  4. 24세 ~ 26세


    닥터노아는 빈곤지역의 대나무를 적정가격에 수급하여 대나무칫솔을 만들고, 판매하는 순환을 통해서 빈곤과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스타트업이다. 나는 이 회사에서는 회의감 없이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타트업을 좀 더 가까이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에 쌓아뒀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사라는 곳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때까지 내가 일 해온 방식이 너무 주먹구구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마다 자괴감이 들었고, 정말 적은 월급을 받지만, 그 월급보다 적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매번 여기를 왜 다니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라는 프레임 안에서 일하는 법을 터득했고, 많은 프로젝트를 문제없이 진행했다. 운 좋게도 이 회사의 공장에서 산업체 복무까지 마칠 수 있었고, 총 3년간 회사를 다니며 학교도, 영상도 손에서 내려놨었다. 이 기간 동안 일을 대하는 방식이 훨씬 이성적으로 변했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좀 더 필요에 의한 행동들로 쌓이게 되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속물이 되었다고나 할까. 공장에서 2년간 일 하면서 오디오북을 100여 권 들었는데, 평소 책을 곁에 두지 않던 내게 결국 지식을 갈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학교에 돌아가서 오랜 휴학을 끊고 하던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5. 27세(지금의 나)

    

    역시 시간은 빠르다. 지난 삶이 몇 단락으로 정리된다는 게 서글프기도, 아쉽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게 태어나서 처음이었고, 그 공부를 26학점을 들으며 원 없이 하고 있다. 매번 무엇인가를 배울 기회가 보이면 손을 들고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머리에, 몸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는 시간들이 너무 즐겁다. 20살부터 하고 싶다고 생각한 공부를 해왔는데, 결국 다들 졸업하고 석박사를 하는 이 시기에 나는 드디어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동시에 미래에 대한 고민도, 두려움도 크다. 이때까지는 밥 먹고 살 정도 벌면 되는 삶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먼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 시점에 왔다. 그래서 매 순간 고민이 된다. 그러나 이 고민조차도 설레고 행복하다. 어떤 걸 하던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말이다. 사회에서 일을 하다 다시 학교에 온 것도 도움이 크게 된다. 왜 이 방향으로 공부를 해야 할지, 왜 저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 이유를 명확히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하다.




그리고. 미래의 나.


    대략 미래의 나는 짧은 구간과 긴 구간으로 나누어질 것 같다. 짧은 구간은 지금부터 약 5년, 그리니까 30대 초반까지이고, 긴 미래는 20년 정도, 그러니까 곧 50살을 앞둔 시기 정도이다. 짧은 구간의 나는 여전히 지금처럼 정신없고 바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고생하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공부와 일을 병행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들에 꾸준히 눈을 돌리고 있을 것이고,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사 안에 있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긴 미래의 나는 나 같은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조직을 만들어 나가고 있을 것이다. 짧은 구간에도 창업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긴 미래에는 좀 더 안정적으로 꾸준히 새롭고 재밌는 무엇인가를 찾아나가는 시도를 여러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그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최고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고 말이다. 나 한 명의 삶은 적당히 다채롭지만, 그런 사람이 여럿 모이면 무한한 다채로움이 생겨날 수 있다. 


    



쓰다보니까 길어졌네. 다음주에는 너의 '나'에 대해서 적어줘!


2023.05.13.

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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