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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맘다해 Sep 23. 2021

월급쟁이의 숙명 #1

"싫어도 있으려면 해야지"

이렇게도 직무가 바뀐다


“C 과장이 퇴사하게 되었으니까 L 팀장이 앞으로 IR 업무도 담당해. 자세한 건 들어와서 얘기하자고."


7년 전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연장 로비를 뛰어다니고 있을 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직속 상사인 이사님이었다.  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관객을 응대하기 위해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공연이 좋아서 무작정 공연일을 해야지 했었다.  그리고 이벤트로 시작해서 15년을 공연기획자로, 제작자로 살았다.  돈이 되는 성공한 작품을 만든 기획자는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콘텐츠를 발굴해 공연을 올리고 배우와 스텝을, 작품과 관객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 왔다.  


그런 공연 쟁이인 나에게 듣도 보도 못 한 IR 업무라니! 

‘그건 도대체 뭐람… 공연이 계속 적자라 돈도 안 되니까 나가라는 건가? 나가면 당장 생활비는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불미스러운 일로 갑자기 퇴사를 하는 C 과장도 원망스러웠다.  남은 공연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기억나지도 않게 멍해졌다. 


공연을 마무리하고 저녁에 회사로 복귀했다.  담당 업무가 공연만은 아니었고, 또 회사가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공연기획사는 아니었기에 공연장과 회사를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퇴근을 미루고 기다리고 있던 이사님이 방으로 나를 부르신다.


이사님: “그동안 IR 자료 L 팀장이 만들었다며? 새로 충원은 안 할 거고 우리 회사가 IR을 하는 회사는 아니니까 그냥 전화 문의 들어오는 것만 응대하면 돼.  주담 역할만 하면 되지 뭐.”


나: “주담이요?  주식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이사님: “몰라도 있으려면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 회사가 공연을 하는 회사도 아니잖아.  이번 기회에 경력 넓힌다고 생각해.”


IR 자료를 만들려고 해서 만들었던 건 아니었다.  같은 팀이라 옆자리에 앉아 있던 IR 담당자인 C 과장이 파워포인트를 잘 못한다고 자료 정리만 해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이미 정리되어 있는 자료를 예쁘게 파워포인트로 만든 것뿐이었다.  단지 그 이유로 주담이 되다니.  주담은 이렇게 아무나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 한켠에서는 어떤 업무이길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해도 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당당하게 ‘no’라고 대답하고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당장 다음 달 급여가 없으면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생계형 월급쟁이였기에 하기 싫어도, 해 본 적 없어 모르더라도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시키는 건 해야 하는 숙명이었다.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라고 방을 나왔다.

공연기획자에서 주식 담당자인 주담으로, IR 담당자로 내 경력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하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전혀 다른 업무를, 해 보지도 않은 사람한테 하라고 해도 되는 거야?'라는 반발심으로 노무사를 찾아서 의논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 해야 하는 업무의 난이도나 어려움보다는 통장에 들어올 급여가 더 매력적이었기 어떻게든 새로운 직무를 받아들이고 해 보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처럼 하기 싫으면 나가야 하니까.  아직 나는 회사를 멋지게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 지식이 없어도 할 수 있으니까 시키는 거 아니겠어?’라는 겁 없는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때론 무모함이 길을 만든다지 않았던가. C 과장도 처음부터 IR 업무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본 업무인 공연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나는 주로 공연장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전임자인 C 과장이 인수인계도 없이 짐을 챙겨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되어 받은 거라고는 내가 만들어 놓은 IR 자료와 그동안 C 과장이 미팅했던 리스트뿐이었다.  그 두 개를 무기 삼아 맨땅에 헤딩하며, 주식 1도 모르는 주린이인 나는, ‘IR’의 I자도 모르는 공연 쟁이었던 나는 주식담당자인 ‘주담’과 ‘IR’ 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을 앞두고 “싫어도 있으려면 해야지”라는 한 마디는, 사회생활 17년 차인 내 경력을 다시 신입으로 만들어 버린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조직이란 하고 싶은 것만 골라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거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기 위한 대안은 퇴사다. 나의 영원한 히어로 故 신해철이 그랬다. “하고 싶은 것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서 싫어하는 것 100가지는 해야 한다"라고.  공연기획자에서 주담으로 변신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아~ 내가 무슨 변신로봇도 아니고.). 그저 나의 경력과 경험을 전혀 접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로 넓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신입이 되어 버렸지만, 또 전혀 다른 분야의 직무이기 때문에 나의 경험과 경력이 시너지를 발휘할지 의문이었지만 분명한 건 나는 희소성 있는 경력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또 누가 아는가, 공연과 IR에도 공통점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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