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서민들의 내집 마련의 꿈이 점점 멀어져 간다는 기사를 자주 접하곤 한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다 보면, 서울이나 지방이나 아파트 공사를 하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운 형편인데, 그 많은 집들은 누가 다 차지하고 있는 걸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지금 우리나라 자가 주택 보유율이 61% 정도라니, 우리나라에서 집없는 사람들의 아픔이 사라지기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인구 대비 주택 보급은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남쪽 끝에 있는 광양에서 거의 평생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최초의 내집을 마련해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직장생활도 서울에서 하다 보니, 우리도 어쩔수없이 생활 근거는 지방에 두고, 서울에서도 전세집을 얻어서,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부동산 투자니, 살림살이 장만 같은 세상 물정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전세 계약 등, 서울에서의 주거 문제는 직장을 핑계로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좀 못된 집주인을 만나 계약 문제로 언짢은 일을 겪고 난 후, 우리도 집을 사야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또 어쩔수없이 서울에서도 내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셋방살이와 관련된 두 가지 상반된 기억이 떠올랐다.
첫번째는 내가 남의 집 문간방에 살던 때의 아픈 상처고, 다음은 내가 주인집 아들일 때 셋방에 살던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1969년도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강원도 영월읍 거운리 산골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집 앞에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동강이 흐르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분지에 정겨운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거기서는 다들 초라하더라도 자기집에서 정말 이웃사촌이란 말에 걸맞게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곁을 떠나 읍내에 있는 셋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도로 사정이나 교통 수단이 너무나 열악해서 집에서 통학을 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영월 읍내에 방을 한 칸 얻어서 자녀들이 모여서 자취를 하도록 했다. 우리는 형제자매가 많아서 내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과 세 명이 그 셋방에서 같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내가 살던 지역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요즘처럼 독채로 세를 얻는다는 건 거의 찾아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본채에는 주인이 살고, 마당 한켠에 가건물처럼 문간방을 만들어 세를 주었다. 대다수의 세입자들은 주인집과 같은 대문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세입자들은 알게모르게 집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상 세입자들이 집주인의 이익 창출에 기여하는 '갑'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집주인들은 자기네들이 세를 든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푼다는 태도로 거들먹거리며 살았던 것 같다. 집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찾는 사람은 많아서, 다시 말하면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세입자가 눈에 좀 거슬린다 싶으면 집주인은 한때 코미디 프로에 유행하던 말, ''방 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전세란 찾기 어렵고, 거의가 '사글세'였다. '사글세'란 말은 원래 '삭월세'란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미리 1년 치의 월세를 내고 낸 돈에서 제해 나간다는 '깎는다'는 의미의 '삭'에 '월세'가 합쳐져서 생겨난 낱말이다. 그 당시에 셋방살이란 '가난'이란 말과 동의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살았던 그 사글셋방은 학교에서 십여 분 거리의 언덕에 자리잡은 기와집의 한 쪽 귀퉁이에 붙어 있었다. 너무 오래 지난 과거의 일이라 좀 왜곡된 기억도 있을테지만, 우리는 본채에 붙은 온돌방 하나에서 잠을 자고, 바깥에 있는 연탄 아궁이에다 밥을 지어서 먹었다. 단열이 잘 되지 않는 얇은 블록으로 쌓은 벽이라서 겨울이면 방 안에 있어도 코끝이 시렸고, 가끔씩 연탄 가스를 마셔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때 그 집에서는 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주인집 어른들과의 관계라든가, 집주인의 갑질 비슷한 횡포가 있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집에 들어간지 몇 달 후에 일어났던 사건 하나는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주인집에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애가 나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어느날 큰 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성격이 얌전한 편이어서 거의 일생동안 그때 말고는 누구랑 치고 받고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다.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여하튼 동생같은 녀석이 자꾸만 나한테 집적대고 약을 올려서, 참다 못하고 몸싸움으로 번진 모양이다. 싸움은 집 주위의 공터에서 벌어졌다. 덩치가 나보다 작은 놈이라서 내가 땅바닥에 깔고 앉아서 몇 대 쥐어박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 쪽 귀 밑이 뜨끔하면서 피가 막 튀는 것이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놀라 어른들을 불러와서,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나는 내 밑에 깔린 그 녀석이 땅바닥에서 집어 휘두른 뾰족한 돌에 맞아 귀 아래쪽이 찢어져서 열 바늘 정도를 꿰매야 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에 그 집에서 치료비를 부담했는지, 또는 어른들 사이에 어떤 사과의 얘기가 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몇 달 후에 우리는 그 집에서 나와 이사를 했다. 셋방살이가 아닌, 말 그대로 우리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부모님은 남의 집에 세를 들어서 산다는 것이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서, 자식들의 기를 죽이는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무리해서 집을 장만했는지도 모른다.
새로 이사를 간 우리집은 당시 우리나라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국민 주택으로, 주변 집들과 비슷한 구조였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 올린 벽에 붉은 기와를 얹었고, 바깥에 연탄 아궁이를 놓아 온돌로 난방을 했다. 그리고 정말 손바닥만한 마당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블록담. 블록담 위에는 도둑을 막기 위해 줄줄이 박아놓은 깨진 병조각도 붙어 있었던가? 작은 대문을 나서면 정겨운 골목길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마당 한켠에 가건물처럼 지어 놓은 문간방이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세입자의 설움에서 벗어나 집주인으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군에 입대할 무렵까지 6년 정도 그 집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우리가 집주인으로서 어깨에 힘주며 세입자들에게 위세를 부리며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할 때면 가끔씩 떠오르는 가슴아픈 장면이 있다. 그건 좁은 우리집 마당에서 자주 벌어졌던 권투 시합과 관련된 것이다.
그때 우리집에 세를 들었던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것도 같은 학년에 다녔던 남자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가 대부업을 하다가 빚을 져서 어디론가 도피를 하고 어머니와 둘이서 우리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애와 나는 그런대로 사이가 좋아서 둘이서, 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자주 어울려서 놀러 다녔다.
그 당시에는 복싱이 굉장한 인기 스포츠라서 프로 복싱 세계 타이틀이 걸린 경기가 열리기라도 하면, 전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시청할 정도였고,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권투 시합을 벌이곤 했다.
내 친구들 중에서 우리집이 형편이 좀 나았던지, 내 소유의 복싱 글러브가 있었다. 우리는 그 당시 학교를 파하고 나면 서너 명이 우리집에 모여서 복싱 글러브를 끼고 마당을 링처럼 사용해 시합을 벌이곤 했다.
''원투, 원투''
하면서 날렵하게 스텝을 밟으며, 가볍게 잽을 날리고,
''어퍼컷, 훅''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을 크게 휘두르기도 했다.
다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서로 목 위는 가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꽤 격렬하게 평소 닦아 왔던 실력을 겨루었고, 옆에서 응원하는 열기도 뜨거웠다.
그때 나와 가장 자주 맞붙었던 아이가 우리집에 세를 들었던 그 친구였는데, 관중은 보통 친구들과 그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들은 본채에 붙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우리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키가 10센티는 크고, 덩치도 좋았지만, 시합을 할 때마다 나한테 밀렸다. 그럴 때마다 우리 어머니는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고, 그애의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웃 복서인 무하마드 알리와 인파이터인 조 프레이저의 경기처럼 그애가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나를 슬슬 피하면서 링 외곽을 도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겠지만, 또 어찌 보면 그애가 주인집 아이인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심리적 부담이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때 그애는 일부러 나에게 져줘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더 나아가 그애는 나와 친구로 지내면서도 항상 자신에게 덧씌워진, 셋방살이라는 어떤 열등의식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괜시리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마저 든다. 여하튼 그 친구와는 군 입대쯤부터 교류가 완전히 끊어졌고, 그 후에 간혹 알 만한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봤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애는 어린 시절에 인간관계에서 깊은 트라우마를 겪고 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 자체를 꺼려하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모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웃간에 벽을 쌓아놓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서울에서 셋방살이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집을 사서 정착한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옆집은 물론 한 사람의 이웃도 사귀지 못한 것이 서로간의 직접적인 교류를 꺼리는 요즘의 풍조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요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풍조가 점점 늘어나는 현상을 누구나 자주 목격할 것이다. 그런 풍조 때문에 젊은이들이 더욱 결혼을 꺼리고, 기혼자들조차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게 아닐까?
얼마 전에 티비에서 로봇이 서빙을 하는 카페에 대한 보도를 보았는데, 거기서 인터뷰에 응한 젊은 청년은, 자기가 이 카페에 자주 오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방해 받기 싫어서.''
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어서 오세요.''
''라떼 한 잔 주세요.''
''잘 마시고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런 정도의 말도 나누기 싫은 사람이 집에서 식구들하고는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지낼까? 그리고 엘리베이터나 계단에서 옆집에 사는 사람과 만났을 때, 고개라도 까딱하고 지나칠까?
요즘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외롭고 공허한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직접적인 교류의 끈이 사라진 탓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예전에 한 집에서 여러 가구가 북적대며 서로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상황도 어떤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건 억지에 지나지 않을까?
통계에 의하면, 날이 갈수록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되면서,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좀더 풍요롭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남의 집 문간방에 세들어 사는 설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지만, 따뜻한 피를 가진 우리 인간들이 서로간에 차가운 콘크리트 벽을 쌓아놓고, 얼마나 오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런지 정말 걱정스러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