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SF #판타지 #드라마
*2020년 10월 13일 밤에 나를 괴롭혔던 꿈을 기억해 정리한 글입니다. 현실이 아니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인류가 암을 극복했다. 큰 병에 걸리기 전, 몸속에서 작은 요인이라도 발견된다면 이를 전면 백지화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된 것이다. 정확히는 ‘나의 몸’에서 병에 걸릴 요인을 배제한 ‘또 다른 나의 몸’을 만드는 기술이다. 얼굴과 신체 조건뿐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과 감각을 그대로 옮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 적어도 암에 걸려서 죽지는 않을, 건강 면에서는 본체보다 상위 호환인 복제 인간이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같은 사람이 두 명이 생긴다. 그래서 잠재적 암 환자인 본체는 죽어야 한다. 본체는 죽음을 느낀다. 정신을 컴퓨터 파일에 비유하자면, ‘잘라내기-붙여넣기’ 해 새 몸에 넣는 게 아니라 ‘복사하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내가 새로 생겨나긴 했지만, 죽어야 하는 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 죽을 각오를 해야, 안 아프게 더 오래 살 수 있다. (이 정도로 의료 과학 기술이 발달했으면서 왜 본체에서 발암 요인만 똑 떼어내지는 못하는 거냐고 묻지 마시라. 나도 모른다...)
윤리적인 문제가 컸다. 스스로 죽을 결정을 내렸다는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똑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살아가게 되지만, 아무도 죽지 않은 건 아니다. 이건 자살인가, 살인인가. 논란의 여지가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정부는 이 기술을 인간에 적용하기에 앞서 반려동물에 한해 상용화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말 못 하는 동물들은 자기 몸이 나빠지는 징조를 주인에게 알리지 못한다. 그래서 병을 한참 키운 뒤에야 발견하고, 내내 아파하다 보내줘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병이 걸리기도 전에 미리 잡아내, 고통을 느끼는 시간 없이 제 명을 다 살게 해 줄 수 있다니.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은 ‘인간이 반려동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광고했다. 서비스 비용이 비싸긴 했지만, 반려동물이 크게 아플 때 병원비가 수천만 원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감당할만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렇게 이 기술은 반려동물 주인들 사이에선 당연한 것이 됐다. 이 꿈의 시대 배경은 확실하지 않다. 2100년쯤은 된 건지, 그 이후인지. 한참 미래의 시간대인데 내가 왜 현재의 나이 그대로, 고양이 ‘나무’와 함께 멀쩡히 살아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꿈속의 세상은 ‘처음 주어진 생명’ 앞에 무심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생명’과 크게 다르게 보지 않았다. 넷플릭스 ‘블랙 미러’ 속에서나 보던 세상이랄까.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윤리의 종말, 생명 경시 풍조 어쩌구... 그리고 나도 그 세상의 일원이었다.
나무의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뒷다리 쪽에 뭔가 문제 요인이 있었다. 병이 발현되면 곧 걷지 못하게 되고 고통 속에 죽어가게 된다고 했다. 병에 걸리기까지 몇 년이나 남았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순리에 맞게 병을 맞이하고, 고통 속에 이별을 준비할 것인가. 아플 일 없는 새로운 나무를 만들어 줄 것인가. 반려동물에 한해 상용화한 이 서비스에는 함정이 있었다. 새로운 동물을 만들고 나면, 기존의 동물은 주인의 손으로 숨을 끊어야 했다. 괜히 남이 죽였다가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친 소리 같지만 미친 세상에선 미친 짓이 당연해진다. 인간의 무병장수를 향한 욕망, 그 욕망으로 가는 길에서 일종의 실험체가 된 반려동물들.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사람들의 이성은 마비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나무를 위해서’ 이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왓챠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뇌를 다운로드해 전산네트워크 속에 영원히 살게 하는 서비스가 나온다. 그러려면 신체를 포기해야 한다. 생명 없는 생명을 위해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유한하고 별 의미도 없는 몸뚱이를 포기하고 뇌를 다운로드하는 게 평생의 꿈인 등장인물도 있다. 아마도 내 뇌 주름 어딘가에 끼어있던 이 드라마에 대한 기억이 어젯밤 꿈에 일조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무서운 무의식의 세상.
꿈속의 나를 조금은 변호해보자면, 새로운 나무는 AI 로봇이나 생김새만 똑같은 복제동물이 아니라 진짜 ‘나무’였다. 나와 함께 한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정확히 같은 존재. 물론 잠에서 깬 지금 생각으론 절대 같을 수 없지만 꿈속에선 그렇게 믿었다. 나무를 아프게 하지 않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나무를 만들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내 손으로 나무의 목을 비틀었다. 평생 유일하게 믿고 사랑했던 누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 직접 나를 죽이는 끔찍한 경험. 나의 고양이가 그런 기괴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아프게 하기가 싫었다면서 이 아픔은 고려하지 못했다. 꿈이어서 다행이고, 꿈인데도 미안하다. 반성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일상에 달라진 건 없었다. 나무는 어제와 똑같았고, 괜히 더 건강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에, 내 손으로 목을 비틀었던 ‘진짜 나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손에 충분히 힘을 주지 못한 것이다. 깨끗하게 죽여주지도 못했던 거다. 꿈이란 게 원래 들쭉날쭉이다. 살아있는 나무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다행히도 멀쩡히 걸어 다녔고, 그러다 새 주인을 만났다. ‘닐’이라는 사람이었다. 영어 이름인 걸 보니 망할 놈의 드라마들 때문에 이런 악몽을 꾼 게 더 확실해진다. 닐은 사무실 책상 밑에 작은 박스를 두고 나무를 거기서 지내게 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닐이라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곧 닐의 직장을 찾았다. 꿈은 참 편리해. 그런데 그 직장에 출입할 권한이 없었다. 꿈이 또 쓸 데 없이 현실적이야. 매일 같이 찾아가서 마주치길 기다렸다. 낮밤으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내 눈 앞에 자꾸만 그려지는 나무의 현재 모습은 의외로 평온했다. 기억을 잃은 건지 어쨌는지, 잘 돌아다니고 잠도 잘 잤다. 기억이 남아있어도 문제였다. 자길 죽이려고 했던 나와 구해준 새 주인 닐, 둘 중에 나무는 닐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살아있는 나무를 봐야만 했다. 아니, 나무를 돌보고 있는 닐이라도 만나야 했다.
내가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절박하게 닐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 고양이가 지금 목이 아플 수도 있다고... 내가 목을 아프게 했었다고. 뼈를 다쳤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제발 병원에 데려가서 진찰을 받게 해달라고 알려야 했다. 일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머릿속에서 내가 나무의 목을 다치게 했던 마지막 기억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됐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서 방치할까 봐, 안 아프게 해 주려고 이런 짓까지 했는데 다르게 아플까 봐. 가증스럽게도 그런 게 무서웠다.
그래서 닐을 만났냐고? 모르겠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기억만 남긴 채 꿈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나무는 내 발밑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비슷한 기술이라도 시장에 나올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 하지만 혹시라도 세상이 미쳐가는 속도가 빨라져서 누군가 이런 짓을 하려고 한다면 난 막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다. 생명은 복사 붙여넣기 더하기 빼기 이런 계산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라고. 후회할 게 분명하다고.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마, 인마, 내가, 꿈속에서, 다, 돈 내고, 울고 불고, 다 해 봤어!”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