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연
‘사랑’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모든 존재를 어여삐 여기는 아가페적 사랑. 그리고 분명히 독립적인 한 갈래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바로 고양이를 향한 사랑이다.
고양이는 신묘한 존재다. 음산하네, 무섭네 하며 싫어하던 사람들을 한 순간에 휘감아버린다.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법을 걸어줄 고양이가 아직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은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 그 마음이 종족 전체에 대한 애정으로 번지게 만든다. 걷잡을 수 없다.
‘고양이’라는 포유류를 싫어해본 적은 없다. 귀엽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사랑한 건 나무가 처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마법처럼 모든 고양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SNS에 올라오는 고양이들마다 너무 예쁘고 남의 집 고양이도 다 예쁘고 길 가다 만나는 고양이도 한없이 사랑스럽다.
눈에 띌 때 잠깐 귀엽고 돌아서면 잊히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본 적도 없는 이 도시의 모든 길냥이가 불쑥불쑥 안쓰럽고 걱정되는, 지구 상에 사랑받지 못하거나 홀로 아프게 죽어가는 고양이가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되는 그런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모든 인간이 사랑스러워 보인 적은 없는데, 고양이는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관심의 크기가 커지면서 ‘아는 고양이’도 늘어났다. 신경 쓰이는 고양이들이 늘어간다는 건 마음 아플 일도 많아진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고양이들이 벌써 몇 마리나 다치거나 세상을 떠났다.
합정동의 단골 북카페 ‘비플러스’는 길냥이들의 성지다. 사장님은 어느 날 찾아온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에게 밥을 주다가 아이들을 가게 안으로 들이게 됐다. 다섯 고양이들에겐 첫째, 둘째, ... 다섯째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소 성의 없는 듯, 하지만 정감 가는. 고양이들은 이내 가게의 마스코트가 되었고, 나처럼 책이 아니라 고양이를 보러 카페를 찾는 손님도 많았다. ‘Cat’의 ‘C’를 따 ‘씨플러스’로 이름을 바꿔야 할 판이었다.
고양이들은 낮엔 자유롭게 동네를 탐험하고, 배고플 땐 카페에서 사료를 먹고 카페가 문을 닫기 전에 돌아와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전문 용어로 ‘외출냥이’였다.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나무를 향한 미안함이 비플러스의 외출냥이들을 보면 조금은 해소되었다. 아이들은 마냥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셋째’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를 걱정하며 많은 추측이 오갔다. 조금 멀리 나갔다가 길을 헤매고 있을 거다, 다른 길고양이와 싸우다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 ‘구조’를 해서 보호소에 데려다준 건 아닐까. 한데 셋째는 이미 성묘에 가깝게 큰 상태여서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얼마 후, 셋째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거라는 가장 가슴 아픈 추측이 기정 사실화되었다. 그리고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길고양이가 이렇듯 누군가의 기억에만 남은 채로 사라져 갔을까. 아무리 고양이를 아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지만 아직 도시는 고양이들에게 너무도 위험한 정글이었다.
몇 개월 뒤엔 첫째가 다쳤다. 피투성이가 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채로 카페에 겨우 돌아와 풀썩 쓰러졌다고 했다. 그래도 살겠다고, 저를 구해줄 사람들이 있는 카페까지 찾아온 게 눈물이 날 만큼 기특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줄 알았는데 수의사 말에 따르면 누군가 작정하고 발로 걷어차며 폭행을 한 것 같단다. 전 인류에 환멸이 들었다. 셋째의 실종도 불의의 사고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쓰렸다.
둘째는 그림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로, 태어난 지 6~7개월밖에 안 됐을 때 출산을 했다. 중성화를 하지 않은 외출냥이여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캣초딩’에 불과한 나이에 출산을 한 둘째는 새끼들의 눈을 핥아줘야 하는 것도 모를 만큼 너무 어렸다. 태어난 새끼들은 대체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고, 몇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런 와중에 살아남은 아이가 태평이었다.
‘내가 안아본 중 가장 작은 고양이. 이렇게 작은 몸이 숨을 쉬는구나. 이 작은 몸 안에서 심장이 뛰고 있구나. 나무도 이렇게 작은 아기 고양이였겠지.’
태평이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들어 자꾸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나무에겐 너무 작아서 쓰지 않던 방석, 나무는 살이 쪄서 먹지 못하는 고열량 사료 등을 부지런히 카페로 날랐다. 내가 놓쳤던 나무의 어린 시절을 뒤늦게 챙겨주게 된 기분이 들었다. 너 하나만이라도 꼭 살아달라고, 나뿐만 아니라 태평이를 아는 모두가 기도했다.
그렇게 많은 마음이 모였으니까 태평이의 가는 길은 아마도 편안했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태평이는 건강한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짧은 생 내내 조금씩 아파하다가 떠났다. 사장님의 품속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눈을 감았다고 했다. 내가 이름을 불러봤던, 내가 품에 안아봤던 동물과의 첫 이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공방에도 외출냥이 ‘요정이’가 있었다. 요정이는 낮에는 자유롭게 외출하고 때론 작업하는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근처 골목을 떠돌다가도 공방 주인이 “요정아, 이요정!”하고 부르면 강아지처럼 달려왔다. 나무가 좀 보고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요정이를 보기 위해 늘 공방 앞을 지났다. 매번 요정이와 마주칠 순 없었지만 사료가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밥그릇만 봐도 마냥 웃음이 나고 좋았다. 괜히 공방에 들려 핸드메이드 귀걸이를 사면서 요정이가 몇 살인지도 물어봤는데 이내 까먹었다. 난 요정이를 아는 듯 몰랐다. 내가 책임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적당히 아는 고양이. 그 정도 거리가 좋았던 것 같다.
어느 날, 닫힌 가게 문 위로 종이 한 장이 붙었다. 요정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메시지였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요정이가 몇 살인지도 기억 못 했던 나는 그 아이가 아팠다는 걸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 길을 지나지 않은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내 마음에 적당히 들어와 놀던 고양이 한 마리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이 정도 거리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날은 하루 종일 우울했다.
내가 알았던 고양이, 아는 고양이, 앞으로 알게 될 고양이 그리고 나의 고양이. 그 모든 고양이들의 안녕을 바라기엔 매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 「아무래도, 고양이」 , 백수진 (책 보러 가기)